11월이 허리를 넘자 산중에 부는 바람 끝이 매섭다. 산사(山寺)는 벌써부터 겨울채비로 분주하다. 산사의 겨우살이 준비는 옛날 여염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않다.
한쪽에서는 구멍 난 창호지에 문풍지를 바르고 또 한쪽에서는 이 겨울 지나 장 담글 메주를 빚느라 바쁘다. 따뜻한 아랫목을 데울 땔감까지 장만해 두면 동장군이 두렵지 않다.
풍경소리가 청아하게 발길을 맞이하는 통도사 경내에도 메주콩 냄새가 구수하다. 새벽부터 팔을 걷어붙인 여신도 50여명의 손길이 해질 무렵까지 쉴 틈이 없다.
콩을 삶고, 찧고, 메주틀에 넣어 모양을 잡는 손길을 따라 산더미처럼 쌓였던 메주콩이 예쁜 메주가 되어 처마 밑으로 순간 이동하는 듯하다. 늦가을 햇살과 바람이 말린 메주가 한겨울을 나면 스님과 신도들의 한해 먹거리는 절반쯤 준비된 셈이다.
겨울준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김장이다. 수행스님들이 먹는 김치는 젓갈을 사용하지 않아 담백하고 깔끔한 것이 특징이다. 또 마늘을 사용하지 않아 김치를 먹은 후에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래 두고 익힐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 김장김치로 제격이다.
11월 셋째 주말, 전남 장성군 축령산 자락 나지막한 암자에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오늘은 이곳의 주지 무학스님과 19명의 동자승이 생활하는 백화도량 해인사에 김장잔치가 열리는 날이다. 먼저 암자 인근의 채소밭에서 쓸 만큼의 배추와 무를 날라야 한다.
절에서 가장 어린 네살 의상 스님을 선두로 동자스님들이 의젓하게 채소밭에 당도했다. 그러나 이내 동네 철부지 어린애들로 변해 온밭을 휘젓고 다닌다." 채소밭 다 망친다"며 쫓아다니는 보살의 걱정에도 스님은 너그러운 웃음으로 지켜볼 뿐이다.
한참의 소동이 끝난 채소밭은 황량한 모습을 드러내고 스님들이 타고 왔던 승합차 안에는 무와 배추로 그득하다. 동자승과 스님의 얼굴엔 이미 긴 겨울 넉넉히 보낼 김장을 마친 듯 미소가 번진다.
겨울 밥상의 절반인 김장을 마치고 나면 산사의 월동준비는 비로소 끝난다. 이제 온 산을 조용하게 덮어 줄 눈이 오시고 나면 긴 겨울 선방의 정진(精進)만이 남는다.
사진·글 왕태석기자 kingwang@hk.co.kr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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