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들은 지금 두 가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하나는 외화유동성 압박, 다른 하나는 중소기업 대출을 채근하는 정부의 압박이다.
이중 달러부족은 조금씩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상황. 하지만 중소기업 지원을 늘리라는 정부의 채찍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은행들이 요즘 중소기업대출 문제를 특히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외화유동성 흐름보다도 더 신경을 쓰는 까닭은, 이명박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비올 때 우산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 "필요한 돈을 제때 풀어주고 있는지 걱정스럽다" "돈이 필요 없을 때에는 갖다 쓰라고 하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안면을 바꾸는 경우를 많이 봤다" 최근 은행들의 야박한 중소기업 대출행태를 지적한 이 대통령의 '어록'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해외순방 중에도 이 대통령의 메시지는 계속된다. 오히려 요구가 전보다 더 많아졌다. "마른 논에 물 대듯 낮은 금리로 필요한 곳에 자금을 공급해달라"(17일 라디오연설) "시중금리가 내려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18일 화상국무회의) 그저 대출만 늘릴 것이 아니라, 금리까지 낮춰달라는 주문이다.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나서는데 공무원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감독당국은 한발 더 나아가 중소기업 대출부진 은행장에 대한 '문책' '제재'까지 운운하고 있다.
물론 여론은 괜찮다. 중소기업 도와주라는 데 반대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은행은 원래 까다롭고 인색한 곳이라 친구도 없는 편이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이고, 경제는 경제다. 아무리 은행이 못마땅해도 이런 식으로 몰아붙여선 곤란하다. 퍼붓는 소나기에 우산까지 뺏는다면 욕먹어도 싸지만, 그렇다고 은행이 쓴 우산까지 중소기업에 넘겨주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통 큰' 지원으로 은행재무구조가 훼손된다면 국민경제 전체로는 손실이 더 클 수 있다. 은행이 망가졌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우리는 10년 전 수십조원의 공적자금 투입경험을 통해 처절하게 경험한 바 있다.
중소기업은 살려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그 희생을 은행에 떠넘겨선 안된다. 중소기업의 '공공적 가치'를 생각한다면, 정부(국민세금)가 책임지는 것이 옳다.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같은 보증기관에 재정을 충분하게 출연함으로써, 중소기업들이 부족한 자기신용을 보강 받아 은행에서 대출 받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현실적 해법이다. 부자들에게 1조원 감세해주는 것보다, 보증기관에 1조원 더 출연하는 것이 경기진작에도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중소기업 문제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것은 좋다. 하지만 관심과 합리적 대책 정도면 족하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시장엔 왜곡이 발생한다. 억지로 대출을 늘리도록 하는 것, 인위적으로 금리를 낮추도록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차제에 이 대통령이 은행 사람들과 한번 만났으면 한다. 취임 후 수많은 경제계 인사들을 만났지만, '은행장 간담회' 같은 것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 대통령이 기업CEO였을 때 금융풍토를 감안하면 은행에 대한 좋은 추억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만남과 대화를 통해 금융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자리는 지시하고 요구하는 자리가 아닌, 듣는 자리가 되어야겠다.
이성철 경제부차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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