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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사 '37년 소격동 시대'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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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사 '37년 소격동 시대' 마감

입력
2008.11.21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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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4일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 국군보안사령부 복무 중 막 탈영한 윤석양(당시 24) 이병이 보안사의 불법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다. 소문만 무성했던 민간인 사찰의 실상이 증거자료와 함께 낱낱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정치, 노동, 종교계, 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를 포함한 민간인 1,300여명이 사찰 대상이었다.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이 사건으로 국방장관, 보안사령관이 경질되고, 악명 높았던 보안사 서빙고분실은 폐쇄됐다. 이듬해 1월 보안사는 이름마저 국군기무사령부로 바뀌었다.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의 주인공으로, 두려움의 대상으로, 무소불위 권력의 상징으로 오랜 세월 서울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던 기무사가 짐을 쌌다. 경기 과천시의 새 집으로 옮기기 위해서다.

71년 전신인 육군보안사령부가 종로구 소격동으로 이전한 지 37년 만의 일이다. 기무사는 18일 "소격동 시대를 마감하고 과천 주암동의 새 청사에서 업무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전기념행사는 24일, 준공식은 30일 새 청사에서 열린다.

기무사의 '소격동 시대'는 많은 이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다. 불법 민간인 사찰 사건에서 보듯 기무사는 '총이 곧 힘'이었던 군사정권 시절을 틈타 군의 울타리를 넘어 힘을 과시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인 81~83년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징집했던 이른바 '녹화사업' 역시 당시 보안사가 주도해 저지른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6명의 젊은이가 의문사했다. 강압적인 사상 개조 과정에서 수많은 가혹행위 의혹이 끊이지 않았으나 아직도 그 전모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군 정보기관이라는 본분과 어울리지 않게 권력의 산실이었던 적도 있다. 79년 10ㆍ26 사건과 12ㆍ12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소격동의 보안사는 5공 정권을 창출해내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전두환 육군 소장이 보안사령관이었던 덕분이다. 대통령도 두 명이나 배출했다.

과천시 주암동에 건립된 새 청사와 부대 시설은 19만여㎡의 부지에 각종 첨단 정보통신시설을 갖춘 20여 개 동의 크고 작은 건물로 구성됐다.

원격 감시ㆍ경계시설, 자동화된 시설관리로 각종 위기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려는 듯 생태공원, 생태터널 등을 설치해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렸다고 한다.

기무사는 50년 대공전담기구의 확대 필요성에 따라 서울 옥인동에서 육군 특무부대로 출발했다. 68년 북한 간첩들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1ㆍ21사태를 계기로 육군보안사령부로 개칭했다. 77년 각 군의 보안부대를 통합해 국군보안사령부가 됐고, 91년 현 명칭으로 바뀌었다.

현 소격동 건물은 1913년 경성의대부속병원으로 건축돼 노후화했다. 이 자리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건립이 검토되고 있다.

기무사는 "과천으로의 이전이 '자유 대한민국 수호와 자유민주체제로 통일지원'이라는 부대이념을 바탕으로 국민과 군으로부터 더욱 신뢰받는 군 정보수사기관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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