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해 보이던 모든 것들, 아니 많은 것들이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있다. 방송의 영역이 대표적이다. 최근 경제위기의 여파로 경영난을 맞게 된 지상파 방송사들이 제작비가 많이 드는 주말드라마, 금요드라마, 일일연속극 등을 곧 폐지할 계획임을 발표했다.
드라마는 경제적 이유로 줄이고
MBC를 위시하여 그간 드라마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오던 지상파 방송사들이 시청률을 견인하는 대표적 장르인 드라마의 비중을 줄인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드라마를 비롯해 방송프로그램의 전체적인 파라미터가 경제적인 이유로 급격히 축소되는 양상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당혹스럽다.
하지만 더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은 최근 가속되고 있는 각종 시사 프로그램들의 잇단 폐지와 변화 움직임이다. 드라마 부문이 축소되더라도 시사교양과 같은 다른 장르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의 종류와 결이 더 풍부해질 수 있다면, 우리 방송문화는 더 다양해질 수도 있고 수용자들의 권익도 향상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폐지나 축소가 예고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시사프로그램들은 이미 정치적인 이유로 속속 폐지되고 있다.
먼저 YTN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던 '돌발영상'이 한 달 전부터 방송되지 않고 있다. 새로운 형식과 감수성 그리고 발랄한 상상력을 갖춘 텔레비전 텍스트로서 '돌발영상'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돌발영상'은 단순히 대한민국 정치판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희화화해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던 가벼운 패러디가 아니라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돌발영상'은 다양한 텔레비전 장치들을 동원해 이 나라 정치인들과 고위 관료들에 대해 촌철살인의 코멘트를 날림으로써, 시청자들로 하여금 정치의 영역을 새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정치나 정치인이라면 고개를 저을 시민들에게 정서적인 측면에서 정치라는 장을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던, 새로운 정치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개척한 프로그램이다.
가을 개편안에 따르면 KBS 1TV의 '미디어포커스'는'미디어비평'으로, 2TV의'시사투나잇'은 '시사360'으로 바뀐다. 이들은 어떤 프로그램인가.'미디어포커스'는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신문 저널리즘과 방송 저널리즘 사이에서 미디어 상호비평의 가능성을 모색해온 프로그램이다. '시사투나잇'은 주류 언론이 보도하길 꺼리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뉴스를 꾸준히 다루는 한편, 'PD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왔다.
보수 대 진보라는 이분법이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언론환경 속에서 치열한 상호비판과 자기성찰의 장을 나름대로 가꿔온 프로그램들을 제작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하루 아침에 명칭과 포맷과 방송시간을 바꿔 폐지나 다름없는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은, 드라마 폐지의 경우처럼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포장할 수 없는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시사프로는 정치적 이유로 변경
공영방송이 지향해야 할 기본적 가치는 공공성, 독립성, 자율성, 다양성이다. 공영방송은 무엇보다 정치권력과 거대자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하며, 공공성 높은 프로그램들을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제작함으로써 획일적이지 않은 다양한 발화의 지점을 확보해 나아가야 할 사회적 책무가 있다.
최근 일련의 시사 프로그램들에 행해지고 있는 조치들은 공영방송이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들을 스스로 훼손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찬 외대언론정보학부 교수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