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에서 엘리베이터 보수와 점검 일을 하는 김성천(45)씨는 탈북자다. 2000년 3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천신만고 끝에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과 태국에서 숨어 지내다가 2001년 9월 서울에 왔다.
꿈에 그리던 한국 생활은 간단치 않았다. 첫 직장은 경남 통영의 한 조선소. "북한에서 살던 곳이 바닷가였기 때문에 통영으로 내려갔어요. 근데 조선소는 제 적성에 영 안 맞았죠." 조선소에서 1년을 못 버티고 떠난 곳은 경북 구미. 한 전자업체의 휴대폰 조립 라인에 취직했지만 이마저도 8개월 만에 그만 뒀다.
중국을 오가며 보따리 무역 장사를 하던 그는 2004년 9월 캐나다 밴쿠버행 비행기를 탔다. 캐나다 이민을 생각하고 떠났지만 3개월도 안 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캐나다 이민생활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돌아 와서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300통의 이력서를 썼지만 그를 부르는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는 퇴짜 맞은 원인을 "세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나이가 많았고, 탈북자인데다, 자신 있게 내놓을만한 기술도 없었다. 나이와 탈북자 신분을 바꿀 수 없는 법. 기댈 건 기술을 배워 자격증을 따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2005년 한국폴리텍대학 김천캠퍼스 전기제어과에 입학했다.
자격증 하나만 바라보고 들어온 대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난생 처음 도전하는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그의 머리를 아프게 한 건 용어의 차이에서 오는 혼란이었다. 수학 기호 루트(√)를 북한에선 '두제곱뿌리'로 부른다. 남한에서 쓰는 전기장치와 설비 용어도 그에겐 무척이나 낯설었다.
"학교생활은 즐거웠지만 힘들었어요. 용어도 새로 외워야 하고, 공부하는 데 하도 애를 먹어 자격증 하나도 못 따고 졸업하면 어떡하나 걱정만 앞섰죠." 그런 그를 도와준 은인은 김종혁 교수였다. 김 교수는 그에게 공부하는 요령을 알려줬고, 따뜻한 격려의 말과 함께 괴로워하는 그를 토닥거려줬다. '남한에서 만난 첫 스승' 덕에 그는 졸업할 즈음, 전기기능사와 승강기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2006년 3월에 들어간 현재 직장에서 받는 연봉은 2,300만원 정도. 차 유지비 등 제반 경기를 빼면 세 식구가 먹고 살기엔 빠듯한 돈이다. 7년이 다 돼가는 남한 생활이 아직도 힘들다. "북한에서 엘리베이터 기술 빼가려고 왔냐"는 농담도 그에겐 여전히 가슴을 후벼 파는 독설로 들린다. 신산하기 그지없는 남한 생활, 그래도 그에겐 희망이 있다. "승강기기사 자격증 공부 중인데요,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서 엘리베이터 설치하고 보수하는 회사를 차릴겁니다."
김일환 고용정보원 홍보협력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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