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은 시 '고향'에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이라고 노래했다. 잘 보존된 고향은 없다. 내게도 그렇다. 생가는 허물어졌다. 생가의 처마 밑 제비집도, 제비 여럿이서 부르는 노랫소리도 사라졌다.
군불을 때던 붉은 아궁이도 매캐한 저녁연기도 언제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 없다. 우는 나를 등에 업고 달래던 누나도 그 예전의 마당에는 없다. 모두 다 그곳으로부터 멀리 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고향은 따듯하다. 장작불 이후에 수북이 쌓인 재 속의 온기처럼.
나의 고향은 직지사와 추풍령 사이에 있다. 직지사가 위치한 황악산의 뒤편이요, 큰 고개 추풍령의 발치에 있다. 직지사에 가서는 기도를 올렸다. 대웅전 찬 바닥에 앉아 있으면 나는 까닭 모르게 서러웠고 눈물이 났다.
눈물을 다 보낸 후에야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곤 했다. 그때 몸과 마음을 씻는다는 것, 고통의 바다를 건너간다는 것의 의미를 어림짐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직지사 조실로 계셨던 관응 스님을 한 번 뵙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진 못했다. 추풍령으로는 7월의 자두와 8월의 포도를 팔러 갔다. 경운기를 몰아 추풍령 고갯길의 여름 땡볕을 밀면서.
김천시 봉산면 태화2리 794번지. 내가 태어난 주소이다. 할아버지도 이 주소지에서 살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이 주소지에서 태어나 평생 농사를 짓다 이제 어느덧 칠순이 되셨다. 아버지의 첫 농사는 천수답에서 시작되었다. 마을에 저수지가 두 개 있지만, 괸 물이 많지 않았다. 해서 여름 장마철이 시작되면 아버지의 발걸음은 어딘가 모르게 힘이 차 보였다.
아버지는 논에 물을 대고 물을 내보내느라 밤새 논에 나가 계셨다. 나는 그런 밤이면 장마를 맞아 마당으로 기어 나온 흉측한 몰골의 두꺼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며칠은 주렸을 배와 축축하고 느린 그 걸음걸이. 그것은 훗날 내 시의 정서가 되었다.
나는 짐승처럼 돌아다녔다. 봄산으로 6월의 논둑길로 여름의 저수지로. 염소와 소를 데리고 다녔다. 낫과 큰 자루 하나를 들고 꼴을 베러 다녔다. 누에를 쳤기 때문에 뽕잎을 따러 다녔다. 솔잎을 긁어 담으려고 11월의 소나무 아래로 갔다.
어느 날은 벌떼에게 내쫓겼다. 염소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저녁에는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물론 염소가 나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아무튼 이 모든 자연과 짐승으로부터 나는 시의 마음과 시의 언어를 배웠다.
하여 호두나무숲과 늘어나던 빈집과 등멱을 하러 엎드린 봉산댁이 모두 나에게 와서 시가 되었다. 숱하게 배달되던 부고와 상여가 나가던 일요일 오전의 풍경이 나에게 와서 시가 되었다. 벼랑집 같은 함박눈이 내리고 쌓이는 풍경이 나에게 와서 시가 되었다.
마을에는 두 개의 굴이 있었고, 이 굴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저수지 아래의 들로 갔다. 이 굴로 리어카와 경운기와 쟁기와 써레를 진 사람이 오갔다. 과일과 마늘과 배추와 콩과 벼가 수확되어 집으로 들어왔다.
굴은 제법 길어서 그 한가운데에 서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해 무섬증이 들기도 했다. 굴의 한쪽은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이 흐르는 수로여서 사람과 짐승이 곧잘 빠지기도 했다. 두 개의 굴은 나에게 와서 이렇게 시가 되었다.
'작대기 하나를 벽면에 긁으면서 굴을 지나간다. 때로 이 묵직한 어둠의 굴은 얼마나 큰 항아리인가. 입구에 머리 박고 소리지르면 벽 부딪치며 소리 소리를 키우듯이 가끔 그 소리 나의 소리 아니듯이 상처받는 일 또한 그러하였다.// 한 발 넓이의 이 굴에서 첨벙첨벙 개울에 빠지던 상한 무르팍 내 어릴 적 소처럼 길은 사랑할 채비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길 내는 법 없다. 유혹당하는 마음조차 용서하고 보살펴야 이 굴 온전히 통과할 수 있다. 그래야 이 긴 어둠 어둠 아니다.'(시 '굴을 지나면서' 중에서)
나는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했다. 마루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면 소나기가 건너오는 것이 잘 보였다. 눈보라가 건너오는 것이 잘 보였다. 산그림자가 마을 쪽으로 서서히 내려오는 것이 잘 보였다.
그러면 하늘이 큰 눈을 한 번 감는 것이 잘 보였다. 그것은 더딘 자연의 속도였다. 그것은 자연이 흐르는 속도였다. 복숭아꽃이 왔다 가고, 산개구리가 내려왔다 가고, 가을 풀벌레가 왔다 가는 속도였다. 지금의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린 걸음의 속도, 자연의 그 우회하는 속도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문학기행으로 고향을 찾아 가서 나는 소켓을 돌려 하얀 등을 주렁주렁 켜는 그 옛집을 다시 보았다. 수탉이 길게 우는 대낮의 고요와 평화를 보았다. 이렁궁저렁궁 말을 거는 맑은 혼들을 보았다. 깻단에 남아 있는 늦가을의 냄새를 맡았다. 나는 다시 고향을 얻었다. 내 문학의 첫사랑인 고향을 다시 만났다.
■ 김천 출신 문인들
김천은 사통발달의 도시다. 북쪽으로 추풍령을 넘으면 충청도(영동) 땅이고, 서쪽 삼도봉 너머는 전라도(무주) 땅이다.
채만식의 <만세전> 에 묘사되고 있듯 일제시대에는 낙동강 지류인 감천내를 따라 수운이 발달, 조선의 5대 시장으로 꼽혔던 김천장이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했다. 시로 승격된 것은 해방 직후인 1949년이다. 만세전>
안동, 문경 같은 인근 도시들보다 서울의 문물이 빨리 들어왔던 김천은 중소도시의 문화와 농촌문화가 동거하고 있는 곳이다. 김천 출신의 한 시인은 이같은 문화적 특성을 '어중띠다'라는 경상도 사투리로 요약했다. 김천이 배출한 문인들의 정서적 자양분이기도 하다.
소설가 김연수(38), 김중혁(37)씨와 함께 문단의 '김천 3인방'으로 꼽히는 시인 문태준(38)씨는 스스로를 '촌것'이라 부른다. 김천시 외곽, 황악산 자락에 있는 그의 고향마을은 바르비종파의 농촌그림 같은 고운 시를 낳았다.
'까마귀가 먹감나무에 와서 짖어댑니다/ 개는 까마귀더러 짖어댑니다/ 우리 집에 소리의 두 오두막이 생겼습니다/ 두 오두막이 처마를 맞대 온통 소란스럽습니다'('까마귀와 개'에서)
문태준 시인과 같은 마을에서 자란 문혜진(32) 시인은 산 속에 둘러싸여 포도농사가 성했던 자신의 고향을 '매 둥지'와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시로 육화된 것은 한가한 농촌마을의 풍광이 아니라 뭉클뭉클한 야성, 꿈틀거리는 원초적 생명력이다.
'여름에 먹는 살짝 언 청포도 푸딩은/ 껍질을 벗긴 개구리알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어느 해 여름이었던가./ 수풀에서 개구리를 화형시켰던 그 아이./ 그때 개구리밥이 떠내려왔던가./ 장마철이었나./ 비가 내린 직후였던가./ 분노를 잔뜩 머금은/ 탱탱한 투명 젤리 속의 검은 눈'('개구리알 푸딩'에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교과서 이외에는 읽어본 책이 거의 없다는 문태준 시인과 달리 그의 중학교 동창인 소설가 김중혁씨는 야구잡지, 영화잡지, 음악잡지를 끼고 자랐다.
김천시내에서 자란 그는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등 음악, 기계, 전자제품 매뉴얼 등을 소재로 한 도시적 취향의 소설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악기들의> 펭귄뉴스>
김천은 교과서에도 실린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조국'에서)로 유명한 원로 시조시인 정완영(89)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 김천에는 그를 사사하는 '시조마을' 동인이 꾸려져 있으며, 김천시는 2005년부터 '백수 정완영 전국시조 백일장'을 열어 김천을 시조의 고장으로 가꿔나가고 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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