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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3> 첫 작품 실패후 '배우 컴백'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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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3> 첫 작품 실패후 '배우 컴백' 권유

입력
2008.11.10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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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다. 한국영화 위기다.’

이 말은 오늘의 이야기지만 어제도 그랬고, 아마 내일도 그럴 것이다. 나의 영화 인생에도 숱한 위기가 있었다. 돈과 명예를 마다하고 내던진 최고 개런티의 배우자리. 그리고 시작한 땡전 한 푼 못 벌 감독자리.

1983년 2월. 그해 겨울은 나에게는 지독하게 추웠다. 부산 동명극장에서 하루 먼저 전국개봉을 시작한 첫 감독 작품 . 아침 기온 영하 10도. 첫 회에 5명의 관객이 찾아왔다. 낮이 되면서 기온이 몇 도 올라갔으나 남포동 거리는 한산했다.

해가 나올 듯하더니 곧 땅거미가 졌다. 부산 앞바다에서 찬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바바리 코트를 세우고 몸을 움츠린 채 매표소 앞을 서성이던 나는 온 몸이 얼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맞은편 포장마차 속으로 몸을 숨겼다.

몇 잔의 소주가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가자 얼었던 몸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마지막 회 매표 마감시간이 되자 매표소 불이 꺼졌다. 재빨리 달려가 매표소 창구를 두드렸다. “총 몇 장이예요?” 가냘픈 여 매표원의 소리가 잠시 주춤하다가 들려왔다. “375장...” 1500석 극장 5회 상영 첫날 객석점유율이 5%였다. 건너편 포장마차도 장사를 포기한 듯 포장을 걷고 있었다.

숙소로 가려던 내 발길이 방향을 잃었다. 그냥 그대로 걸었다. 거리엔 인적마저 뜸했다. 멀리 부산 앞바다에서 정박한 배들을 세차게 후려치는 파도소리가 들렸다. 긴 그림자만 내 곁을 지키며 함께 걷고 있었다. 아침 비행기 티켓을 버리고 밤 열차를 탔다. 다음 날 새벽, 서울역 플랫폼에도 나를 거부하는 듯한 세찬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었다.

택시기사에게 종로3가로 가자고 하였다. ‘서울은 좀 다르겠지...’ 그러나 서울도 ‘무정하긴’ 마찬가지였다.‘서울극장’의 첫 날 스코어도 극장 앞에 나를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게 했다.

첫 작품이 흥행에서 실패하자 주위에서 배우 자리로 돌아오라고 시나리오가 숱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몇 년 동안 감독 준비하느라고 수입이 없었으니 생각을 돌리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내 자신이 그것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몇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고 영화사 문을 수없이 두드렸다. 다행히 한 영화사에서 제안이 왔다.

제작비 7,000만원에 만들어 보겠냐는 것이었다. 평균 제작비 2억원의 3분의 1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당시 관객은 한국영화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고육지책으로 정부는 연간 한국영화 4편을 만들어야 외국영화 수입권을 주는 한국 영화 진흥책을 운영하고 있었다. 영화사는 외화 수입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아쉬운 김에 좋다고 받아들였다. 기획된 작품은 몇 개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김유정’의 단편모음 ‘소나기’, ‘땡볕’, ‘솥’이었다.

각색자를 이영일 선생과 나한봉 선생으로 정하고 작품명을 <땡볕> 으로 결정하였다. 일본 식민 탄압시대를 어렵게 이겨나가는 한 조선인 가정의 삶을 “땡볕”아래의 삶에 비유하기로 하였다. 제작비에 맞게 등장인물을 간소화하여 시골의 한 젊은 부부 한 쌍과 파괴자 한 명으로 하였다. 출연료 예산 또한 제작비의 10%로 책정돼 신인을 기용하는 길 밖에 없었다.

신인을 찾기 위해 연극계, 방송계를 이잡듯 뒤지고 다녔다. 제작자는 내가 안 돼보였는지 <신의 아그네스> 로 연극계에서 최고로 뜨고 있는 윤석화 씨를 추천하였다. 윤석화 씨는 내가 일찍이 그녀를 ‘서울의 달빛 0장’에 데뷔시키기 위해 이 영화사와 출연계약을 마친 상태였다. 나는 예산도 여유가 생기고 흥행에도 좋다고 생각이 되어 쾌히 동의하였다. 급기야 뉴욕에 체류하고 있던 그녀가 날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상상치도 못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작은 소녀 하나가 눈에 뜨인 것이었다. 어느 전자상가 앞을 걷던 내 발길이 멈춰선 것은 너무도 우연이었다. 쇼윈도에 놓여진 TV에서 우유광고를 하고 있었는데 유명 탤런트 뒤로 까만 눈동자의 소녀 한 명이 웃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의 작은 소녀! 나는 전자 상회로 뛰어들어가 직원에게 지금 방송된 광고 내용을 물었다. 그가 알 리가 없었다. 나는 집으로 달려와 채널을 고정시키고 광고를 기다렸다.

다음날 아침 영화사 사무실에서 윤석화 씨를 만났다. 그녀는 작품은 바뀌었지만 나와의 작업이 마침내 이루어졌다며 몹시 기뻐하였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그녀를 반가워하며 보고 있는 내 마음 한 복판으로는 어제 본 한 소녀가 달려가고 있는데.

마침내 나는 그 소녀의 신분을 찾았다. 그녀를 만나보고 난 후 그녀에게 주인공을 시켜보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더 굳어지고 있었다. 내 결심을 눈치 챈 제작자가 급제동을 걸고 들어왔다. ╂邦渼?연기 한 번도 안 해 본 여고생을 주인공인 부인 역으로 기용하겠다는 내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바꿀 수 없었다.

사정을 파악한 윤석화 씨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도리가 없었다. 정식으로 오디션을 통해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윤석화 씨는 역시 대단한 배우였다. 자신의 명성을 버리고 신인과 경쟁을 하겠다고 쾌히 승낙하였다. 오디션은 그녀의 체면을 위해 작은 영화사 기획실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졌다. 쪽머리에 한복을 입은 두 후보자에게 메이크업이 마쳐지고 대사들이 주어졌다.

먼저 윤석화 씨의 연기가 시작됐다. 정광석 촬영감독의 카메라 스위치가 돌아갔다. 그 다음 후보자가 연기를 시작했다. 동그란 얼굴의 한 소녀, 하얀 피부의 앳된 몸매에서 거침없이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카메라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는 촬영감독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윤석화 씨는 신인에 비해 외모에 있어서 훨씬 세련됐고 연기 면에서도 탁월했다. 하지만 그녀는 현대적이었고 도시적이었다. 반대로 소녀는 고전적이었고 농촌에 좀 더 어울렸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작자가 문을 닫고 나갔다. 윤석화 씨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잠시 후 사장실에서 주요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오디션을 한 장면이 상영되었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제작자가 입을 뗐다. “하감독. 당신, 정신 나간 거 아니야.” 흥행으로 보나 작품으로 보나 스타를 기용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나의 지나친 모험심으로 첫 작품을 흥행실패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자가 나에게 특별한 애정으로 예산 외에 스타를 기용하게 해 주니 고맙게 생각하고 따르라며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텅 빈 사무실. 나는 다시 테이프를 돌렸다. 그리고 또 돌렸다. 나의 마음은 더 굳어가고 있었다. “좋다. 다시 낭떠러지로 떨어지자.” 이튿날, 나는 제작자에게 통보를 하였다. “맨 땅에 헤딩 한 번 더 해 보겠습니다.” 그리곤 7,000만원만 보내 달라고 한 뒤 촬영지인 강원도 정선으로 짐을 싸서 떠나버렸다. 차 속에서 제작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소녀를 주인공으로 결정했소.”

_방년 18세, 동명여고 3학년생. 조용원.

그녀가 1년 후, 전세계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으리라고 대체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984년 여름, 내 영화 인생에 몰아 닥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나는 이렇게 탈출을 기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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