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 가두리양식장 사장의 호출. 즉시 서울에서 제주로 날아갔다. 007작전이 따로 없다. "OO 골프장으로 와주게." 도착할 즈음 휴대폰이 울린다. "골프가 끝났어. 사우나에서 만나지." 가운만 달랑 걸친 알몸 면담은 매서웠다. "어떤 놈(펀드)부터 가지를 쳐야 해? 이놈(기존 투자종목)은 영 맘에 안 들어, 하나 새로 골라봐." 사장의 재산 규모(수십 억원)와 신상정보, 투자 포트폴리오가 가득 담긴 노트북이 지르르 떨린다. 조직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밤낮없이 작성한 '오직 가두리양식장 사장만을 위한 파일'이 스르르 열린다.
#2. 모 증권사 이모 연구원은 최근 일본 출장에 나섰다. 명색이 VIP고객을 위한 '골프 투어'인데, 골프채는 잡아보지도 못했다. 대신 시장을 꿰뚫는 집요한 질문에 답을 주느라 오금은 저리고 입술은 바싹 말랐다. VIP들은 몇 차례 고개를 주억대더니 이내 라운딩에 나섰다. '수십 억원이 될지, 수백 억원이 될지 모르는 투자 결정은 기다리는 수밖에….' 이 연구원은 홀로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시 부르심을 앙망하며.
'슈퍼 개미(고액 개인 투자자)'의 입질이 시작됐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 물린 일반 개미들에게 '위기가 기회'라는 투자원칙은 그림의 떡. "못살겠다"는 아우성의 틈바구니에서 슈퍼 개미들은 은인자중하며 바야흐로 '때(투자시점)'를 기다린 셈이다. 그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증권사 연구원(보통 애널리스트)들의 발바닥은 땀이 날 지경이다. 까다롭고 철두철미하지만 한번 결정으로 수십 억원의 투자자금을 대는 고액 투자자를 일반 고객처럼 대할 수는 없는 노릇. 산간오지 등 전국 방방곡곡, 술집 사우나 등 장소 불문하고 그들만을 위한 서비스에 나서고 있다. "안 가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
L연구원은 곧 강원도 출장에 나선다. 강원도 전체를 통틀어 지점이 한 곳밖에 없는 터라, 내친김에 강릉 속초 양양 주문진 등지의 VIP가 부르는 가가호호를 방문할 예정이다. 그는 "일주일에 평균 두세 번 지방출장을 다녀오거나,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를 잔뜩 긴장한 채 지키노라면 몸은 녹초가 된다"고 했다. 주말엔 골프장 문턱(클럽하우스)에서 1시간 이상 VIP를 위한 즉석설명회도 마다치 않으니 휴일이 따로 없다.
그나마 설명하는 시간이 낫다. 애써 준비했어도 '한 사람을 위한' 1대1 맞춤 자료이기 때문에 한번 쓰면 폐기 처분해야 한다. 더구나 고액 투자자들은 정보도 빠르고 난도(難度)도 높아 대충 준비했다간 본전도 못 찾는다.
지방으로 돌다 보니 시간이 빠듯해 본연의 업무(종목 및 시황분석)도 뒤쳐지기 일쑤다. 증권사 연구원이 모르는 내용을 VIP가 알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오현석 삼성증권 투자정보파트장은 "딜레마지만 결국 잠 덜자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보통 VIP 응대는 연구원이 아닌 프라이빗뱅커(PB)의 몫이다. 그런데 최근 증시 폭락세가 이어지면서 "PB를 못 믿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다 보니 PB보다 연구원이 더 각광을 받는 것이다. 고객 확보가 우선인 영업직원이나 PB와 달리, 시장이나 종목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도 연구원의 장점이다. 이 때문에 VIP 고객들이 증권사 조직의 핵심 브레인인 연구원들을 직접 초빙하는 것이다.
코스피지수 1,000 붕괴가 신호였다. 이후 객장 및 대규모 투자설명회는 파리를 날리고 있지만, 1인 혹은 소규모 투자자문은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게 증권업계의 전언이다. 재테크에는 젬병인 것으로 알려진 의사들이 100억원대 투자클럽을 조성하는가 하면, 부동산으로 돈깨나 번 땅부자와 연예인들도 기회를 노리고 있다.
물론 부자들의 걱정도 다르지 않다. 이선엽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원은 "다시 외환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 탓에 부자들도 현금을 어디다 둘지 고민하고 있다"며 "특히 '불패신화'를 누렸던 부동산 부자들은 주식과 펀드에서 실패를 맛보면서 부쩍 걱정이 늘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특별 서비스'를 찾는 횟수도 잦아졌다는 것이다. 실제 10월 실질고객예탁금(개인들의 주식 매수용 자금)은 4조9,055억원으로 월간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부자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