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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2> 이애리수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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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2> 이애리수의 자존심

입력
2008.11.10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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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황성옛터'를 최초로 노래 부른 이애리수(李愛利秀ㆍ99) 여사를 내가 만나 최초로 기사를 쓰게 된 것은, 최초의 연예기자 출신인 나로서는 매우 영광이며 행복한 일이다. 어째서 영광이며 행복인가?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가 100세가 다된 나이임에도 건강하게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를 부른 가수지만 단 한번도 언론인과의 만남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또 셋째로 무엇보다 잘못 알려진 한 여인의 삶을 내가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이 영광이고 행복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유인촌 장관이 우리나라 대중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태스크 포스(TF)를 구성하고 그 진흥책을 곧 발표하려고 하고 있는 때라서 이러한 발굴은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나서 며칠동안 고민을 했다. 지금까지 조용히 살고 있는 그를 공연히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해서 불편해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있었고 또 가족들이 매스컴의 공세를 잘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잡고 인터뷰 기사를 쓰기로 결심을 했다. 우선 신문이나 방송, 잡지, 인터넷 등에서는 이애리수씨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생사 불명인 것으로 돼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잡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의 삶을 지탱해온 자존심을 정확하게 자리매김하도록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생겼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입장에서 내 어머니가, 또는 내 할머니가 한 세상을 멋있게 살아 왔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조용하게 살아오신 분이 갑자기 신문 방송에서 거론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하고 생각하는 가족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 어머니가 역사의 한 주인공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달리 마음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잘못 알려진 내용들을 제대로 고쳐야 하는 의무는 가족들에게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 가야 할 일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를 부른 이애리수 여사는 100세가 다 되도록 단 한 번도 신문이나 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왜 언론을 피했을까?

그의 생각일 수도 있고 집안의 방침일 수도 있다. 결혼을 한 후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아이들을 낳아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별 의미 없이 매스컴을 만나서 인구에 회자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가 언론을 일절 피해 왔기 때문에 그의 인생 99년 만에 언론인으로서 내가 최초로 공식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고맙고 흥분 되는 순간인가? 나는 이번 인터뷰 기회에 그나 그의 가족들이 이애리수라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 지거나 얼굴이 유명해지지 않기를 바라게 된 사연도 명백하게 밝히자는 생각도 하게 됐다.

내가 이 여사를 만난 것은 2008년 10월 21일, 경기도 일산에 있는 어떤 요양원 아파트에서였다. 건강이 많이 나쁜 것이 아니라 워낙 고령이기 때문에 요양을 하기 위해 이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사는 큰 아들인 배두영씨와 함께 안산에 살고 있었는데 일산에 사는 그녀의 막내딸이 가까운 곳에 뫼시고 싶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그의 아파트는 바깥출입이 편리하도록 1층에 있었고 널찍한 방 3개에 5명의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모두 6명이 기거하고 있다. 또한 3명의 간병사들이 있어서 식사를 비롯한 모든 일을 돌봐 드리고 있기 때문에 불편함은 전혀 없는 듯했다.

나는 그의 장남인 배두영씨와 함께 아파트로 들어서면서 그녀의 얼굴에 깊고 굵게 파여져 있는 주름살을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99년 동안 겪어 온 삶의 질곡이 그 속에 담겨져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80년 전 수많은 젊은 청년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미모의 스타가 지금 저렇게 말없이 휠체어에 앉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 갈 때 그녀는 간병사의 도움을 받아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죽과 몇 가지의 반찬이 점심 식단이었는데"하루 세끼 여러 가지 죽을 드시는데 항상 남기지 않고 모두 비우신다"고 간병사가 말했다. 그리고 간병사들은 그녀를'이음전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음전(李音全)은 이애리수 여사의 본명이다.'음전'이란"언행이 우아하고 점잖다"라는 뜻이다.'소리 음'자가 들어가서 노래를 잘 하게 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우연일 뿐이다. 하지만 노래를 잘 한 것은 사실이다. 노래만 잘 한 것이 아니라 공부를 아주 잘 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본명이 이보전(李普全)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이음전 여사는 경기?개성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예쁘고 총명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9살 때 잠깐 동안 아역 배우로 활동을 한 것도, 워낙 키가 크고 예쁜 외모 때문에 극단주들이 꾸준히 요청하는 바람에 이뤄진 것이다.

그녀는 개성에 있는'호수돈 여고'를 졸업했다. 호수돈 여고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현재 대전으로 이전해 있는데, 미국 여성이 설립한 신식 학교로서 일제에 항거하는데 앞장 선 명문 여학교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조선의 딸을 길러 주는 훌륭한 학교"라고 칭송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음전 여사는 이 학교에서 줄곧 1등을 하는 등 공부를 잘 했고, 반장을 도맡아 하면서 적극적인 학창 생활을 했다. 이 같은 그의 적극적인 성격과 자존심 강한 생활력은 훗날 결혼하고 자녀들을 기르는 모습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음전'이라는 본명 대신'이애리수'라는 예명으로 산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연예인으로 산 것도 몇 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몇 년 되지 않는 세월이 그의 인생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나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한 채 지금까지 100년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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