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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4> '땡볕' 촬영 강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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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4> '땡볕' 촬영 강행군

입력
2008.11.10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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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아니면 살기다.”

필름 1만8,000자. 촬영횟수 15회. 단역 5명, 보조출연 20명. ARRI 2C카메라(2차 대전 당시 종군기자용). 25일간 강원도에서 촬영완료.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제작비 7,000만원 중 10분의 1로 전 연기자 기용.

두 여주인공은 신인 오디션에서 뽑은 조용원과 이혜영. 이혜영, 그녀 역시 한참 인기가 오르고 있던 김진아와 경쟁하여 캐스팅된 배우였다. 신인이지만 그들을 개런티에서 기죽이고 싶지 않았다. 최고의 신인 출연료를 주었다. 남은 배역은 남 주인공 역. 막 뜨고 있는 A씨가 머리에 떠올랐다. 제작부에게 나머지 예산으로 그 배우를 계약하게 하고 두 배우를 데리고 촬영을 시작했다.

조용원은 CF 경험이 있었고 이혜영은 연극무대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촬영 현장은 처음이었다. 그들에게 현장에 어떻게, 빨리 적응시켜야 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먼저 조용원을 첫날 촬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촬영 분을 가장 힘든 장면을 찍기로 하였다.‘강간 장면’이었다. 촬영감독이 신인에게 첫날 촬영 분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겠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매도 일찍 맞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현장에 함께 온 조용원의 어머니를 촬영지에서 격리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조명을 마친 방안에는 조용원과 강간하는 마을 지주 역을 맡은 주상호씨, 촬영감독 그리고 나만이 있었다. 조용원은 작중 강간당하는 장면과 현재 그녀가 당하고 있는 처지가 다를 바가 없는 듯 공포에 떨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로 저거다.’ 나는 실제 그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재빠르게 카메라 스위치를 넣었다. 그녀의 옷이 벗겨지며 그 위로 남자의 손길이 더듬어 올라가자 그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밖에서 그녀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장면’을 찍느냐는 것이었다.

촬영감독에게 빨리 서두르자고 눈짓을 하였다. 찰나 그가 나에게 한 곳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녀 몸 뒤로 빨간 빛의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이어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중단할 수 없었다. 급히 밖에 대기하고 있던 여 스크립터를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재빠르게 촬영을 마쳤다. 조용원은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무슨 장면을 어떻게 연기하였는지 자신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웃으며 첫날 너무 힘든 장면을 촬영하였다며 어깨를 감싸 주었다. 촬영을 마친 그 날 모두가 말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현장으로 가는 나에게 제작부장이 달려왔다. 오늘 촬영할 이혜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조감독이 달려왔다.

이혜영이 새벽에 서울 가는 첫 버스를 타는 것을 마을 사람이 보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계획을 바꿔 조용원 분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돌아온 대답은 그녀도 대학입학원서를 써야 한다며 어젯밤 마지막 버스로 서울로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숙소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두 배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서울에서 빗발같이 전화가 걸려왔다. 한 주간지에 조용원이 촬영현장에서 감독에게 겁탈 당하여 도주하였다는 기사가 특종으로 실렸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제작자로부터도 확인 전화가 걸려왔다. 조용원의 가족도 그녀가 몸져누워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급기야 내가 태도를 결정하였다.

제작자에게 여배우 교체를 통보한 것이다. 이혜영이 타워호텔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있다는 제보를 입수하여 제작부원이 그녀에게 여배우 교체 사실을 통보하였다. 당연히 제작자와 책임소재를 두고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제작자가 제작중단이라는 강수를 두었다. 이튿날 스탭들이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때였다. 제작부장이 내 방문을 부서지듯 열고 뛰어 들어왔다. 조용원과 이혜영이 한 밤중에 도착하여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감독을 불러 이혜영의 촬영을 준비시켰다. 그러려면 모두 짐을 풀어야 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며 스탭들을 끌고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이혜영의 첫 촬영 역시 날아갈듯이 마쳤다.

나는 돌아온 그녀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이 작중에서 해야 할 일만 이야기 하였다.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그들이 촬영장을 야반도주한 사연이 흘러나왔다. 영화에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은 감독이 두려웠다는 것이었다. 두 여주인공의 분량을 다 찍을 동안 남주인공 캐스팅이 출연료 문제로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도리가 없었다. 쓰고 있던 벙거지를 벗어던지고 미용사에게 내 머리에 바리캉을 대라고 하였다.

모두들 눈이 동그래졌다. 그 숱한 돈의 유혹도 물리쳤던 나였지만 내 감독 작품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공짜가 아닌가.’ 준비한 남주인공의 허름한 농부 옷을 걸친 채 카메라 앞으로 달려 들어갔다. 두 배우들을 오가며 카메라 앞에서 ‘레이디 고우. 컷.’을 외치며 연기하였다. 본인이 만든 캐릭터이고 대사들이니 연습도 필요 없었다.

하루 평균 50컷 찍을 스케줄을 초과, 100컷도 넘게 찍기도 하였다.

마침내 ‘소달구지 위 섹스 신’ 촬영 날이 다가왔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정선 길을 찾았다. 'S 자’로 된 경사 길은 정말 일품이었다. 시나리오 헌팅 차 강원도를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산 중턱에 앉아 적막한 고갯길을 아무 생각 없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한 농부가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한 여인이 나타나 무료하게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언뜻 묘한 생각이 들었다. 저 달구지 위에 저 아저씨와 저 여인이 함께 타고 간다면? 그리고 껴안고 눕는다면? ‘오리지널 카섹스...?’ 이렇게 시작된 장면이 이것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장면을 찍는데 황소가 그만 뿔이 나 버렸다. 질투가 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무거운 짐을 실은 달구지 위에서 두 남녀가 궁둥이를 까고 놀고 있으니 황소가 기분 좋을 리 없었다. 화가 날대로 난 황소가 마구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와 이혜영이 놀라서 돌아다보니 아래가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황소는 식식대며 달렸다. 순간, 내 몸이 달구지와 황소 엉덩이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뻥-’ 소리와 함께 몸 위로 무거운 물체가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는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가물가물 사람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첫마디는 ‘혜영이는?’이었다. 목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왔다. “...무사해요” 그제서야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혜영이와 달구지 위에서 깔깔대며 뒹구는 모습에 질투가 나 굴러가던 황소 눈알이. 나를 부축해 주던 촬영감독이 말했다. “하감독이 달구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은 너무 겁이 나서 그만 스위치를 껐어.” 너무도 아쉬웠다.

다행히 항문이 찢어져 장파열을 막았다는 보건소 의사의 걱정스런 얼굴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현장으로 달렸다. 소달구지가 지나간 내 허리 위에 지게가 얹혀졌다. 그리고 조용원을 짊어지고 강을 건넜다. 우리는 그렇게 해 냈다. 약속한 필름1만8,000자 중 1,000자를 남겼고 예정된 25일 만에 촬영을 마친 채 한밤중 영동고속도로를 탔다.

<땡볕> 아래 끈질기게 살아남은 우리 민족의 혼처럼 우리는 해 낸 것이다. 그해 겨울, 유럽에서 소식이 왔다.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본선 초청장이 날아온 것이다. 그들은 <땡볕> 에서 혹독한 독재의 수렁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한국인의 원형질을 보았다고 했다.

1985년은 전두환 독재정권이 ‘미친 소’처럼 치달리고 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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