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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희의 막전막후]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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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희의 막전막후]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

입력
2008.11.04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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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남루한 삶과 역사를 신화로 승격시키는 것은 가능한가.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는 여기에 도전한다. 창단작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로 특유의 따스한 시선과 사람살이의 온기,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는 '극단 이루'의 경주 시리즈 두번째 작품이다.

연극은 핵 폐기장 유치 결정으로 욕망과 이해관계가 난무하는 곳, 만파식적과 문무대왕릉의 설화적 세계가 공존하는 경주 감포를 배경으로 이 세상 '아비다움과 어미다움'의 다툼과 화해를 다룬다.

한국의 어미 중 하나인 '분이'와 아비 중 하나인 '설씨'의 한과 업이 뒤섞인 사연을 바탕으로, 경주 외곽의 장터를 살아가는 변두리 인생들을 섞어 사투리 생생한 이야기 좌판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빈방에 도배하고 들창에 쫄대 대고'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비 설씨는 과거 형수였던 분이와 선산 명의이전 문제를 두고 악연으로 얽혀든다. 젊은 시절 '남편을 잡아먹은' 과수댁 분이는 시댁에서 쫓겨나, 생계를 잇기 위해 양공주가 되고 미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는다.

그러나 놀림 끝에 아들이 죽자 분이는 아들을 죽게 만든 열수의 집을 불사르고, 와중에 머리를 다쳐 사람 구실 못하게 된 열수와 길에서 얻은 맹인처녀 덕이를 아들과 며느리 삼아 새로운 삶을 꾸린다. 선산을 팔아 좌절한 아들의 사업자금을 대려는 설씨의 부정(父情)은 분이의 쌓인 한과 충돌하고, 분이는 명의이전을 요구하는 설씨에게 어깃장을 놓는다.

호적과 상속 문제를 둘러싼 아비의 유교 윤리와 버림받은 '천하의 새끼들'을 보듬으려는 어미의 도리가 부딪쳐 파국으로 치닫는다. 대왕암의 아비다움의 가호와 만파식적 구원의 설화는 이들의 갈등과 현실의 도가니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연극은 미군의 편지를 집문서보다 소중히 여기며 부재하는 아비다움을 향한 동경을 바다 건너 미군에게서 구하는 한국의 억척 어멈 분이의 결여된 역사 인식에 대해 어떤 단죄도, 성찰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연민과 애정 속에서 분이로 대속되는 우리 못난 역사와 삶을 다른 신화쓰기로 승화시키려 한다.

핵 폐기장 유치 현실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사회성이나 역사의식을 요구하기에는 사실 연극은 너무 애살스럽다. 다만 굽은 나무 선산 지키듯 고향을 지키는 어수룩한 이들과 변두리 인생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에필로그로 붙인 '분이, 덕이, 열수' 세 사람이 그리는 새로운 가족도는 아비의 신화가 저무는 자리, 이 세상 고통에 귀 기울이는 관음보살도로, 어미의 신화적 도상으로 다가온다. 손기호 작ㆍ연출. 16일까지, 선돌극장.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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