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는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말을 통해 우리 삶의 고통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불교의 근본 원리인 사제(四諦)의 첫 글자를 딴 '고집멸도' 에서 '고(苦)'란 현세에서의 삶은 곧 고통이라는 진리를 이르며, '집(集)'은 괴로움의 원인이 끝없는 애집(愛執)에 있음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고통은 쾌락을 갈구하고 한없이 소유하려는 자기 욕심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이다
집착과 욕심이 가져온 큰 고통
이런 점에서, 억만장자를 꿈꾸며 금융파생상품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금융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천재적인 월스트리트 사람들이나 '돈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금융기관들의 부실을 눈감아 준 세계적 신용평가사 임직원들의 행태는 물질에 대한 애집을 보여준 극치라 하겠다. 그것이 초래한 세계 경제위기는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도덕적 해이가 가져온 미국발 금융위기는 한 개인이나 나라의 고통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결코 그 영향권 밖에 있지 않다. 물론 우리도 무고한 피해자만은 아니다.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칠 열차를 노다지 행이라고 믿고 앞 다투어 탄 것도 결국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었던가?
IMF 이후 겪었던 국민들의 시린 삶을 생각하면 이제 시작에 불과한 불황의 긴 터널 앞에 선 우리는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직했고,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했으며, 얼마나 많은 아동이 끼니를 걸러야 했던가? 당시 '노숙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회를 반영하는 새로운 단어로 자리잡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와 유사한, 아니면 더 강력할지 모를 쓰나미가 빈곤층과 서민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번 경제침체로 빈곤층이 증가하고 기존 빈곤층은 더 극빈화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런 증후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생계형 범죄가 증가하고 주식 폭락과 사업 부도, 갚을 길 없는 사채 빚을 비관한 자살이 속출하고 있다. 학교 급식비를 지불 못하는 가정의 아동 수도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최저생계비 이하 생활을 하는 빈곤층은 500만을 넘었지만 국가의 생계 및 의료보장 혜택을 받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2007년 12월 현재 85만 2,000가구, 약 155만 명에 불과하다. 수급에서 제외된 일부는 일정 기간 특례 혜택을 받기도 하지만 그 수는 매우 미미하며 대부분은 영세자영업이나 임시직, 일용직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실물경제가 나빠지면 이들의 상황은 곧바로 소득 단절로 이어지고 극빈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얼마 전 야당이 내놓은 2009년도 정부 복지예산안 검토자료에 따르면 정부의 내년 빈곤ㆍ취약계층 지원예산은 동결되거나 삭감된 상태다. 기초생활보장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3,265억 원 삭감되었고 취약계층 지원사업이 포함된 재량 지출도 감소하였다. 정부가 금융권과 기업 살리기에는 여념이 없는 반면, 취약계층은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사회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했다. 국민의 고통과 요청에 정부나 당이 이념이나 이해관계를 내세워 이를 외면한다면 이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국민 개개인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제도적 차원에서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기꺼움을 가져야 할 것이며 개인은 기부나 자원봉사 등을 통해 동참해야 할 것이다.
나눔을 통해 희망을 공유해야
나눔은 타인에게만 희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베푸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미 얻었다"는 공자의 말처럼 나누는 자에게도 희망인 것이다. 여러 학자들은 나눔이 우리 신체에 엔도르핀을 분비시키고 질병에 잘 견디게 하며 장수의 비결이 된다고 지적한다. 우울한 요즈음을 사는 국민들, 스트레스 올리는 주식과 환율표만 바라보지 말고 나눔을 통해 엔도르핀 도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홍순혜 서울여대 사회복지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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