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한중 합작영화 '삼국지:용의 부활'의 개봉을 앞두고, 이 영화와 무관했던 국내 투자배급사 쇼박스의 관계자들은 흥행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자신들이 주요 투자자로 참여해 7월 개봉되는 홍콩 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적벽대전:거대한 전쟁의 시작'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쇼박스의 한 관계자는 "'삼국지'에 너무 관객이 들지 않으면 '적벽대전'도 도매금으로 넘어갈 수 있고, 너무 흥행이 잘 되면 우리 영화가 묻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국 '삼국지'는 100만명, '적벽대전'은 160만명이 관람하는, 그저 그런 성과를 올렸다.
다른 듯 닮은 영화의 제작. 새로운 소재를 찾으면서도 보편성이라는 상업적 성공의 근거를 마련해야 하는 상업영화인들이 피해갈 수 없는, 천형과도 같은 현실이다. 까다로운 관객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신 트렌드를 좇으면서도 차별화되는 이야기를 찾다 보면 기시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여럿 나올 수밖에 없다.
불황의 몸살을 심히 앓고 있어서일까, 충무로엔 그렇게 유난히도 엇비슷한 장르의 닮은 꼴 영화들이 줄을 이어 개봉 대기 중이다. 잘 하면 세 몰이로 유행을 선도하며 '무임승차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자칫하면 그 밥에 그 나물로 치부돼 동반 추락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농후하다.
11월 13일 개봉하는 김민선 주연의 '미인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 신윤복을 남장 여인으로 그린 일종의 퓨전 사극. 화폭과 스크린을 농염하게 물들이는 에로티시즘이 성인 관객을 공략하려 한다.
이정재, 김옥빈 주연의 '1724 기방 난동사건'(12월 4일 개봉)은 레게 머리를 한 조선의 주먹들이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의상을 입고 펼치는 일대 활극이다.
누가 봐도 21세기적 색채가 짙은 사극이다. 조승우, 수애 주연으로 내년 설 연휴 개봉 예정인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명성황후와 호위 무사의 사랑이라는 팩션(Factionㆍ사실을 기초로 꾸민 이야기)을 현대적 시각으로 읽어낸다.
한 편 한 편을 놓고 본다면 다들 개성 만점의 사극들. 하지만 한 달 가량 간격으로 잇달아 개봉 예정이다 보니 관객들에겐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눈에 띌 가능성이 높다. 한 영화 관계자는 "불황 탓에 관객들의 선택기준이 더 까다로워졌는데 자칫 한 묶음 영화로 치부될까 우려된다"고 토로했다.
11월 13일 동시에 선을 보이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와 '소년, 소년을 만나다', 12월 개봉할 '쌍화점'도 운명의 장난에 휘말릴 상황이다. 세 작품 모두 남자 간의 동성애가 드라마의 굴곡을 깊고 높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담'을 기점으로 한 계절이 멀다 하고 선보인 1930~40년대 배경 영화들의 부진도 이들 영화 관계자의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지난 2일 극장에 걸린 '모던 보이'는 당초 올 봄 개봉 예정으로 예고편까지 나갔던 작품.
'모던 보이' 제작 관계자는 "시대적 배경이 같은 '원스 어폰 어 타임'과 '라듸오 데이즈'가 1월 31일 개봉하는 바람에 비슷한 영화로 보일까 봐 개봉을 늦췄다"고 말했다. 영화계는 시대적 배경이 동일한 영화들의 잇단 개봉이 흥행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고 있다.
더구나 올해와 내년은 1년 개봉 편수가 지난해의 반토막이 될 것으로 예상돼 영화의 소재ㆍ배경의 지나친 쏠림이 충무로 전체를 마비시키는 독소가 될 가능성도 있다.
영화평론가 A씨는 "개봉작이 적을수록 다양한 영화들이 서로 '윈윈'할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며 "비슷한 영화들의 출혈 경쟁이 충무로의 침체를 가속화시킬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반면 영화평론가 정지욱씨는 "각자의 개성을 지닌 영화들이기에 나쁜 영향을 주기보다 서로를 보완하면 보다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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