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33> 그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33> 그대

입력
2008.10.28 00:16
0 0

노래 속에 갇힌 정인(情人)너무 진지해 현실서 배척당한… 그러나 변치않을 연정의 詩 '그대'

흔히 지적되듯, 한국어 화자들은 가까운 친구나 손아랫사람들한테 말고는 2인칭 대명사를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한국어에서 널리 사용되는 2인칭 대명사는 '너(희)(들)'과 '자네(들)'밖에 없다.

그 자리에 없는 손윗사람을 높여서 일컫는 3인칭 대명사 '당신'이 더러 2인칭 대명사 노릇을 하긴 하지만, 그 쓰임새가 매우 제한적이다.

'구닥다리' 부부들이 서로 상대방을 일컬을 때, 또는 금방 주먹이 오고 갈 듯한 저잣거리의 험한 분위기에서 상대방을 지칭할 때 쓰는 2인칭 대명사가 '당신'이다.

문법책엔 '그대'라는 말이 버젓하게 2인칭 대명사로 올라있다. 사전에도 "[편지글 따위에 쓰이어] 1) '너'라고 할 사람을 대접하여 일컫는 말 2) 애인끼리 '당신'이라는 뜻으로 정답게 일컫는 말"이라 풀이돼 있다.

문법 교과서나 사전이 언어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편지글에서든 입말에서든, 21세기 한국어 화자들은 '그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농담의 맥락 바깥에서 손아랫사람이나 애인을 '그대'라고 일컬으면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 알맞다.

미치지 않았으면서도 농담의 맥락 바깥에서 '그대'라는 말을 입밖에 내는 사람은 두 부류다. 첫째는 사극(史劇)에 등장하는 캐릭터고, 둘째는 대중가요 가수(나 작사가나 일부 시인)다.

첫 번째 경우는 '지금-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이젠 대중가요 관련자들이나 일부 시인들만이 (직업적으로) '그대'라는 말을 쓸 특권을 지녔다. 그 때의 '그대'는 제 연인(이거나 연인이었으면 좋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절절한 사랑 노래의 주인공 '그대'

그대라는 말이 들어간 대중가요 텍스트를 모아놓자면, 어지간한 부피의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지금 내게 얼른 떠오르는 구절들만 해도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대 없이는 못 살아", "그대여 변치 마오", "오 그대여 이 한마디만 해주고 떠나요" "그대 사랑 안에 머물러" "그대와 영원히" "그대는 모르죠", "그대 돌아오면" "그댄 달라요" 등 한이 없다.

이 '그대'는 쌍팔년도(젊은 세대는 대개 '쌍팔년도'를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으로 알고 있으나, 이 말은 본디 단기 4288년이었던 1955년을 일컫는 말이다) 가요에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요즘 만들어지는 신식 대중가요에도 등장한다. 적어도 노래 안에서는 그만큼 생명력이 강한 말이다.

시인들도 더러 이 말을 애용한다. 긴 세월 꿋꿋한 대중적 호소력을 보여준 청년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도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로 시작한다.

이미 쓰여진 시를 가사로 삼은 가곡도 적지 않으니, 가곡에도 드물지 않게 '그대'가 등장한다. 김남조의 시에 김순애가 선율을 붙인 '그대 있음에'가 그 예다.

시도 넓은 의미의 노래에 속한다면, '그대'는 노래 속에만 존재하는 말이다. 그 말이 노래 바깥으로 튀어나왔을 땐 우스꽝스러움의 기호가 되지만, 노래 안에 얌전히 갇혀 있을 땐 진지한 연심(戀心)의 기호가 된다. 그렇다.

'그대'는 진지하다. 때로는 너무 진지하다. 사전에는 편지글에 쓰는 말이라 풀이돼 있지만, 나는 이 글의 독자들에게 서신에서든 전자우편에서든 제 연인을 '그대'라고 일컫지 말기를 간곡히 권한다. 물론 농담의 맥락에선 써도 좋다.

그러나 진지한 연서에서라면 절대 이 말을 써선 안 된다. 이 말의 '과잉 진지함'이 수신자의 웃음보를 터뜨릴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대'라는 말의 진지함이 발신자의 진지함과 짝힘을 이루며 연서(의 내용)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대'의 과잉 진지함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진지함 그 자체로 머무는 곳은 시를 포함한 노래 안에서일 뿐이다. 세대 탓이겠지만, 나는 대중가요 가운데서도 70년대 것을 좋아하고, 그 가운데서도 신중현이나 이장희의 노래를 좋아한다.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젊었을 때부터 내 애창곡이었다. 요즘도 친구들과의 술자리 끝에 노래방에까지 진출하게 되면, 이 노래를 꼭 부른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드릴게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게 있네"로 나가는 이 노래를 나는 아마 백 번도 더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는 나도, 내 노래에 맞춰 '블루스'를 추는 친구들도, '그대'라는 말에서 과잉 진지함이 낳는 촌스러움이나 낡음을 느끼지 않는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라는 허풍도 '그? 앞에서는 진지하게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이 아니더라도,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가사는 이장희 것치곤 떨어진다. '나는 열아홉이예요' '잊혀진 사람' '불 꺼진 창'에서와 같은 낭만적 데카당스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가사엔 조금 모자라다.

더구나 '그대'는, 고리타분한 문법학자들에 따르면, '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므로, '드릴 말'이나 '드리리' 같은 경어체와는 썩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랴. 이 가사에서 '그대'는 바로 거기가 제 자리인 듯 편안하다.

사극에서 보듯, 중세 한국인들은 이 말을 노래 바깥에서, 그러니까 대화나 서신에서도 썼을 것이다. 그 시기의 형태는 '그듸'나 '그디'였다. 그것은 사랑의 2인칭이라기보다 (하대의) 보편적 2인칭이었다.

그렇다면, 일상어에서 '그대'가 사라져버린 지금, 노래 바깥에서 '그대' 노릇을 하고 있는 말은 뭘까? 자기? 이 말도 이젠 많이 낡았다. 오빠? 그럴 듯하다. 오빠라고 불리는 사람은 그 상대를 '너'라고 일컫겠지. 당신? 가능하다.

내 또래 사람들 가운데도 이 낡은 말을 애용하는 이들이 있다. 임자? 이 말이 아직 살아있긴 하지만, 그 수명이 많이 남은 것 같지는 않다.

자기 오빠 자리 꿰찬 2인칭

사적인 얘길 하는 게 허락된다면, 아내와 내 얘기를 하고 싶다. 서른 해 전 연애를 시작할 즈음 아내는 나를 '뚜뚜'라고 일컫거나 불렀고, 나는 아내를 '미미'라고 일컫거나 불렀다.

'뚜뚜'(toutou)는 강아지를 뜻하는 프랑스 아이들 말이고, '미미'(mimi)는 고양이를 뜻하는 프랑스 아이들 말이다. 의성어 '멍멍'과 '야옹'을 뜻하기도 한다.

내가 제안한 것 같긴 한데, 30년 저편의 일이어서 이 말들을 고른 계기는 떠오르지 않는다. 사귄 지 한 해쯤 지나서 '미미'는 '미'로 줄었고, '뚜뚜'는 '뚜'로 줄었다. 그러니까 지난 30년 가까이 나는 아내를 '미'라 일컬었고, 아내는 나를 '뚜'라 일컬었다.

나는 아내를 '미'라고 부르거나 일컬으며 '나'(영어 me)를 생각했다. 아내는 나를 '뚜'라고 부르거나 일컬으며 '너'(스페인어 tu)를 연상했을까? 모르겠다.

이 '뚜'와 '미'는 우리 부부가 나이 쉰 줄에 들어선 지금도 여전히 사용한다. 다른 말로는 서로 부르거나 일컬을 수가 없다. 내겐 서로 너나들이를 하는 여자 친구들도 꽤 있지만, 아내와는 너나들이를 못한다.

그저 '미'와 '뚜'를 주어나 호칭으로 삼은 반(半)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이 '반말'이라는 말 역시 흔히 '하대'의 뜻으로 쓰이지만, 본디는 존대도 하대도 아닌 어중간한 말투를 가리켰다.

"우리 밥이나 먹지" 하는 식으로 말끝을 흐리는 것이 반말이다.) 내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제 엄마와 아빠가 상대를 부르는 말을 기묘하게 여겼으나, 설명을 듣고 납득한 체했다. 속으론 촌스럽다고 비웃었을 것이다.

우리가 요즘 젊은이라면, 아내(나보다 겨우 한 살 아래다)는 나를 '오빠'라거나 '너'라 일컬을지도 모르지. 나는 아내에게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도 아내를 '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미미'와 '뚜뚜'가 채용되기 전까지, 나는 아내에게 '고종석씨'였고, 아내는 내게 '박귀주씨'였다. '여보'나 '당신'이라는 말은 우스개의 맥락에서도 써 본 적이 없다.

나이 쉰이 돼서도, '여보'나 '당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닭살이 돋는다. 내 또래의 다른 사람들은 우리 부부의 '미'와 '뚜'에 닭살이 돋을 테지. 아무튼 우리 부부는 '미'와 '뚜'로서 한 세대를 살아왔다. 편지글 속에서까지.

혹시 내가 아내에게 헌정하는 시를 쓰거나 노래를 짓는다면(그럴 일이 있을 리는 없겠으나), 그녀를 뭐라고 일컬을까? 아마 그녀와 만난 뒤 처음으로 '그대'라는 말을 써볼 것 같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