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편은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화장실 벽체에 타일을 붙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 가장으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하게 된 일입니다. 친구에게 일당을 받으며 막일을 해주고 일이 끝난 후엔 밤늦도록 혼자 타일 붙이는 연습을 하며 기술을 배웠습니다. 처음 부산으로 내려와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영도대교와 부산대교를 수없이 걸어 오가며 일자리를 알아보다 친구와 연락이 닿아 시작한 일입니다. 남편은 지금 제법 인정 받는 타일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처음 몇 년 기술을 익히기까지 설움을 얘기하려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친구야 십 수년 쌓은 실력이니 하루 이틀 쉬어도 생활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남편은 하루를 쉬면 그만큼 일당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새벽에 나가 속이 달아 기다리던 친구로부터 "하루 쉬겠다"는 말을 들으면 맥이 빠져 차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하염없이 영도대교를 걷다가 들어오곤 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답니다.
남편은 이를 악물고 기술을 배우더군요. 현장 소장들까지도 인정할 만큼 지독하게 일을 익혔습니다. 그러다 혼자서 독립을 했습니다. 그간 얼굴을 익힌 건설사 사장님과 소장님들께 서툴지만 맵시 좋게 마무리하는 성실성을 인정 받아 일도 제법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2년쯤 남편 혼자서 고생을 하는 걸 보고 "저도 집에서 노느니 함께 따라가 일을 하고싶다"고 했습니다. '하다 못해 청소라도 해주면 되겠지'하는 맘으로, '그것만이라도 해주면 남편 일이 좀 수월해지겠지'하는 맘으로 따라 나섰습니다.
처음엔 무지 반대하데요. "고생은 한 사람만 하면 되지 뭐 하러 같이 고생하냐"고, "여자가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쉬운 일이냐"면서 "집에서 애나 잘 돌보라"했지만 "하루만이라도 해보고 도저히 못하겠으면 관두겠다"고 기어코 졸랐지요. 그렇게 나간 첫날, 전 아파트 현장 한 귀퉁이에서 정말이지 온몸을 떨며 서럽게 울었습니다. 전 우리 남편이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지 몰랐습니다. 혼자서 타일 한 장 붙이기까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물을 길어다 시멘트가루를 섞고 붙이고….
현장에서는 화장실 한 칸 타일 일을 완성하면 얼마라는 단가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익숙한 숙련공은 하루에도 서너 칸은 보통이지만 손이 서툰 우리 남편은 한 칸도 겨우 마치는 정도였으니 남들보다 몇 배 더 힘이 들었을 겁니다. 곁에서 잔일을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좀더 속도가 나겠지만 일당을 주고 사람을 쓰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혼자서 그 많은 일을 하며 한 칸 한 칸 하려니 얼마나 마음이 바쁘고 힘이 들었을지…'그 생각만으로도 전 가슴이 먹먹해지고 너무나 아팠습니다.
"우리 남편이 이렇게 돈을 벌어 처자식을 먹여 살렸구나. 몇 푼 더 벌겠다고 밤늦도록 야간작업까지 했구나"싶은 생각에 남편이 짠하고 안쓰러워 울었습니다. 남편에게는 이런 모습 들킬까 봐, 그러면 못나오게 할까 봐 밝게 웃으며 신나서 일을 하는 척 했습니다. "나와서 당신이랑 일하니까 너무 좋다. 당신도 내가 있으니 안 심심하고 좋지?" 남편은 남편대로 속없이 떠드는 내가 짠한지 "어디, 한번 해봐. 며칠이나 가나 보자"며 서글프게 웃더군요.
지방으로 일을 갈 때가 아니고 부산에서 일이 있으면 악착같이 따라 다녔습니다. 새벽에 남편 먼저 나가면 전 아들녀석 챙겨 학교 보낸 뒤 사먹는 밥도 아까워 도시락 싸 가지고 버스타고 다니며 남편을 도왔습니다. 일이 너무 고된지라 어떨 때는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굳은살 박힌 손바닥이 쓰라려 애를 먹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손발도 맞추고 눈치도 생기면서 남편이 기술을 익히는 게 눈에 띄더군요. 잔일을 하느라 소비되는 그 시간을 제가 해주고 남편은 오로지 타일만 붙이니 속도가 점점 빨라져 버는 돈도 제법 늘어가니 신이 나서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났습니다. 요즘은 부산에 일이 없어 지방으로만 다니고 있는 남편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전 돈보다도 남편 일을 조금이라도 돕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제가 해준 일만큼 남편이 작은 마음의 여유라도 갖고 쫓기듯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우리 남편은 지방에서 일하자면 여관에서 자야 하는데 그 돈도 아깝다며 차에서 잠을 잡니다.
남편 차가 화물차인지라 바닥에 스티로폼 깔고 이불 한 장 깔고 자는데 불편은 없다지만 어찌 편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씻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내 집 같은 편안함하고는 거리가 멀지요. 그래도 그래야 한다네요, 남편은. 저야 청승 떨지 말고 편하게 여관 하나 잡아서 장기 투숙하라 했지만 남편은 몇십만원하는 여관비로 아들놈 학원하나 더 보내주라데요.
제가 언제 한번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남편은 아들녀석의 양부입니다. 제가 재혼하면서 한 가족이 된지 벌써 햇수로 십년이 돼가네요. 아들 성도 남편 성으로 바꾸었고 세상 어느 가족보다도 당당하게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남편의 이 고생은 우리 모자가 아니면 안 해도 될 텐데 하는 미안함도 있었지만 남편은 항상 제게 말합니다. "애비가 자식 키우느라 고생하는 게 뭐 그리 큰소리 칠 일이냐?"며 자기는 이렇게 귀한 아들놈을 얻게 되어 세상에서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고, 오히려 애비가 못나서 비싼 학원하나 메이커 운동화 하나 제대로 못 사주는 게 너무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경기가 어서 빨리 회복돼서 부산에도 아파트 짓는 현장이 많이 생겨 남편이랑 함께 도시락 싸 들고 다니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이 처자식을 위해 지고 있는 짐 한 쪽이나마 덜어주고 싶은 제 맘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부산 영도구 청학1동 - 정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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