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삼각형'만큼이나 '반미 보수'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다. 친미는 보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현실에서 반미 보수란 말은 성립하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우리 사회에 분출하는 미국 성토는 그동안 '친미'를 중요한 가치로 강조해온 강경 보수인사들이 주도한다. 대표적 보수논객인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최근 칼럼에서 '배신감' '우리를 화나게 한다' '어이없게 만들고 있다' 등의 격한 표현으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빼준 부시 행정부를 질타했다. 조선일보 출신의 보수논객 류근일씨도 얼마 전 칼럼에서 김정일의 핵 공갈에 굴복한 부시 정부를 요리조리 비꼬았다.
보수 정치인들도 단단히 화가 났다. 23일 열린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의 외교통상부 국정감사는 부시 행정부에 대한 국정감사나 다름이 없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를 필두로 '미 행정부의 중대한 실책' '부시 대통령의 임기 말 업적 챙기기' '제2의 애치슨 선언'이라는 등의 성토가 줄줄이 이어졌다. 집권 한나라당의 대표까지 미국을 비난하고 나선 상황이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미국비난 목청 높이는 보수
문제는 이 같은 우리사회의 보수 반미가 일과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미국의 언론들이 차기 미국 대통령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민주당 오바마 후보는 북한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환영했다. 당선되면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겠다고 밝힌 바 있는 그이고 보면 임기 말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 기조를 이어받아 한 발 더 나갈 것이 확실하다. 진보적인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면 보수성향의 이명박 정부와의 코드 불일치로 한미관계가 크게 나빠질 수도 있다.
그때 우리 사회의 보수진영은 어떻게 나올까. 반미운동에서 좌우 임무교대가 이뤄질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우리사회 좌파의 반미는 미국의 특정 정파에 대한 선호가 아니라 미국의 헤게모니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친미로 돌아설 가망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좌우가 반미 연대를 하는 일도 벌어질까.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 설정이 불편하다면 보수진영은 최근 북미협상 결과의 득실을 다시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테러지원국 해제를 안 하면 핵 재처리 시설을 다시 가동하고 2차 핵실험이라도 감행할 것 같은 북한의 압박에 미국이 물러섰다. 철저한 검증체계 구축이라는 입장을 관철하지 못한 채 북한에 씌웠던 테러지원국 모자를 벗겨준 것이다. 이 장면만 보면 북한 벼랑끝 전술의 승리가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이 얻은 것도 작다고만 할 수 없다. 핵 불능화 조치의 완료와 신고된 영변 핵 시설의 철저한 검증은 더 이상의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을 완전 차단한다는 것을 뜻한다. 영변 핵시설에서 채취하는 시료 분석만으로도 북한의 핵 과거를 완벽하게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은 부시 대통령이 자랑해도 될 만한 업적이다. 우라늄 농축이나 핵 확산 증거에 대한 검증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북미 간의 신뢰 수준에서는 그 이상은 욕심이다. 북미가 피차 일정한 수준의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 리스크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엄청난 비용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북핵의 완전 폐기는 숨이 긴 바둑인데 중간에 돌을 던지라고 하기도 어렵다.
다시 따져볼 북핵 협상결과
또 하나 테러지원국 해제가 북한에는 멍에를 벗는 것이기도 하지만 중대한 시험대라는 점이다. 이제 북한과 국제사회 사이에 있던 울타리 하나가 없어졌다. 의지만 있다면 국제사회로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셈이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고대해 마지 않는 보수진영은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옳다.
테러지원국 멍에로 상징되는 '미국의 대북 압살책동 정책'은 북한 체제유지논리의 핵심이다. 이게 없어지는 마당이니 북한은 새로운 체제유지 논리를 개발해야 하는데 김정일 정권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김정일 체제의 진짜 고민이 시작되는 순간에 보수의 반미 성토는 방향이 맞지 않는 것 같다.
이계성 논설위원ㆍ한반도평화연구소 소장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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