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지정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국보' 또는 '보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처 받지 않도록 아주 귀하게 모신다. 잘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문화유산이 많은 나라일수록 밖에 나가서 큰 소리 칠 수 있다. 그리고 외국 손님들이 올 때 목에 힘 줄 수도 있다. 이건 변하지 않는 법칙이다. 그래서 숭례문이 불에 탈 때 우리 국민들은 가슴을 치며 울었다.
하지만 이게 뭔가? 피맛골이 헐릴 때 우리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고 후손들이 물어 오면 무슨 대답을 할 것인가? 숭례문이 국보 1호라면 피맛골은 우리 서민들의 국보 1호다. 그게 지금 몽땅 헐리고 있다. 여기서 막걸리 마시고, 빈대떡 먹고, 해장국 훌훌 먹고, 소리소리 질러 대며 노래 부르고, 지글 지글 타는 생선 냄새 맡으며 청춘을 보냈다. 그런 이 골목길이 허무하게 헐리는 것을 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무력함을 어찌 할 것인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 좁은 골목, 추억 어린 골목은 많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피맛골은 다른 골목과는 다른 골목이다. 왜 그러냐 하면 조선시대 양반님들, 특히 고관대작들이 말을 타고 지나 갈 때 그걸 피해 들어와 걸어 다녔던 서민들의 길이기 때문이다. 말을 피해 다녔다고 해서'피마한 골목'인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서민들만 다닌 것이 아니라 고관들도 슬금슬금 다녔고, 심지어는 임금님도 변장을 하고 이 길을 다녔다고 한다. 객주가를 비롯해 이런저런 재미를 주는 곳이 있을 뿐 아니라 시정의 여론을 살피는 데는 여기가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임금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6,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경호실 몰래 밀짚모자 쓰고 나타나서 빈대떡에다 막걸리를 마시곤 했던 곳이 바로 이 피맛골이다. 얼마나 멋있는 곳인가? 그 피맛골이 지금 사정없이 헐리고 있다. 100년도 못 사는 인간들이 '100년이 넘는' 이 멋있는 길을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마구 헐고 새집을 짓고 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새집을 짓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몽땅 헐어 버리고 새로운 집을 짓기 전에 다른 방법을 찾아 볼 수는 없었을까?
피맛골이 헐리기 시작할 때 신문이나 잡지에 많은 글들이 실렸다. 안타깝다느니, 아깝다느니, 옛날 추억이 어떻다느니, 등등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 대안의 의견을 제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언론인들, 글 쓰는 사람들, 사회의 저명인사들, 그리고 도시계획의 전문가들이 나서서 '피맛골'의 운명을 걱정하면서도 어째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가 말이다. 서울의 가장 중요한 요지, 세종로 한 가운데 있는 이곳이 '개발'이라는 명제에 밀려 헐릴 수밖에 없다면, 개발과 보존을 병행하는 최소한의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나는 도시행정이나 도시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따라서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 밖에 할 수가 없다. 피맛골의 역사적인 의미, 국민들에게 안겨주었던 포근함의 상징을 그대로 두면서 이 동네를 재개발 할 수는 없었을까?
예를 들어서 오래된 골목을 사정없이 헐지 말고 그 위에 교각을 올려 옛 모습의 골목길은 살리면서 건물을 지을 수는 없을까? 어차피 신식으로 골목을 만들어 준다고 하는데 그건 '피맛골'이 아니다. 그냥 깨끗한 골목일 뿐이다. 추억이 있고, 사랑이 있고, 슬픔과 아픔이 깃들여 있고, 사람의 냄새가 수 백 년 배어 있는 그런 골목은 아니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다. 그 골목은 무엇 때문에 만드는가? 옛날 피맛골이 아닐 바에야 그 신식 골목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제부터 한 200년이나 300년이 지나면 정다운 골목이 될지 모르지만, 미안하지만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본다.
내가 흥분하는 것은 내 개인의 취향 때문이 아니다. 이 좁디 좁은 골목, 사람 하나 지나가면 옆으로 비켜 줘야 하는 이 골목길은 우리나라가 가진 소중한 멋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으로 있을 때, 천신만고 끝에 국제영상자료원연맹 총회를 서울로 유치한 적이 있다. 2002년 4월 제58차 총회의 서울 개최를 앞두고서 였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총회를 열기 1년 전에 집행위원들이 개최 예정 도시를 방문하여 장소를 확인하는 전통이 있어서 2001년에 국제연맹(FIAF) 집행위원들이 서울에 왔다. 나도 물론 그 집행위원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 회의를 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삼성동의 코엑스(COEX) 빌딩에서 총회 하는 것을 싫어하고 구 도시인 강북에 장소를 구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총회 장소를 세종문화회관으로 정하고 그들의 숙소도 광화문 부근으로 했다. 각 나라에서 온 수 백 명의 대표들은 아주 즐거워했다. 경복궁을 비롯한 고궁들도 가깝고, 남대문 시장이나 백화점들도 가깝고, 명동이나 인사동도 걸어 갈 수 있는 거리이고 대학로도 가까워서 매우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그들은 청진동을 끼고 있는 피맛골을 좋아했다. 막걸리와 선지 해장국을 먹고 생선구이를 즐겨 찾았다.
음식도 좋지만, 그들은, 약간은 지저분하지만 오랜 전통이 있고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그 골목길을 매우 좋아 했으며 심지어 나한테, "당신네는 대 도시 한 가운데 이런 골목길을 가지고 있어서 부럽다"는 말까지 했다. 이런 사람들이 이 다음에 서울을 찾아와서 그 골목길(피맛골)을 가고 싶다고 하면 나는 어찌해야 될는지? 깨끗하고 멋있는 건물은 전 세계 어디에든 다 있다. 뉴욕에 가면 서울의 건물은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그 뉴욕에도 소호나 차이나타운, 오프오프 브로드웨이 같은, 옛날 분위기를 풍기는 골목을 우리처럼 마구 헐어 버리지는 않는다.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다. 피맛골의 옛 모습은 그대로 살리고 그 위에 건물을 덮어 씌우는 방법은 힘 드는 일일까? 그것이 윈윈(Win-Win)이 아닐까?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한 시민의 소견 일뿐이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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