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달로스는 아테네 사람입니다. 재주가 많아 건축이나 공예나 기계를 만드는 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질인 탈로스가 뱀의 턱뼈에서 영감을 받아 톱을 발명하자 그를 시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서 그를 떨어뜨려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이달로스는 곧 체포되고 판결을 받아 나라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미노스 왕이 있는 크레테로 갔습니다. 그런데 왕비 파시파에가 낳은 황소 모습을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부끄럽게 여긴 왕은 다이달로스에게 그 황소를 가두어 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다이달로스는 수많은 방들과 복도들이 뒤엉켜 누구도 길을 찾을 수 없는 거대한 궁을 짓고 거기에 그 황소를 가두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미궁(迷宮ㆍ라비린토스)이고, 그 길을 미로(迷路)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영웅 테세우스가 그 미궁에 들어가 황소를 죽이고 무사하게 되돌아 나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왕은 노하여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빠져 나오도록 해준 다이달로스를 그 궁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미궁을 벗어났습니다.
무척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간추렸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미로에서 출구 찾기' 또는 '미궁에서 벗어나기'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테세우스가 미궁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미궁에 들어서면서부터 실타래를 풀면서 들어갔고, 다시 그 실을 따라 되돌아 나왔기 때문입니다. 무척 간단했습니다. 듣고 보면 참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될 거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했단다" 하는 말에 공감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러한 발상을 하는 일은 흔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문제를 푸는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면 대체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형편이 이처럼 심각한 문제가 된 까닭을 살펴 그 근원을 찾아가 그것을 밝히면 지금을 풀 수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방법을 우리는 늘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을 알면 지금을 설명할 수 있다든지, 발단을 알면 종국을 예측할 수 있다든지, 원인을 알면 잘못된 결과를 풀어낼 수 있다든지 하는 태도가 모두 이에 속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 지금 여기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곤 합니다. 인과론(因果論)이 그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을 아는 적절하고 분명한 인식론일 뿐만 아니라 문제를 푸는 효과적인 준거이기도 합니다. 실을 좇아 되돌아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원인을 찾아 되짚어 좇으면 마침내 결과의 궁경(窮境)을 벗어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이기는 해도 삶은 그렇게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끝날 만큼 소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 곧 미궁은 실타래를 풀며 들어간 정황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는 준비가 다 되고 부닥친 문제라면 처음부터 그것이 미궁일 까닭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 꼬리를 잡았다는 것은, 그래서 그것을 좇아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실은 자의적(恣意的)인 상상이지 실제는 아닙니다.
난국에 처할 때마다 제시되는 처방이 제각기 나름대로의 합리성이나 실증적인 접근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화경(萬華鏡)적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벗어났다고 느낀 순간 여전히 미궁 안에 있음을 거듭 확인하곤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다이달로스는 다른 방법으로 미궁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준비한 실도 없었고, 실을 풀며 미궁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그 방법은 그에게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들킨 방법이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가 처한 곤경이 결코 원인을 찾아 그것을 밝히면 풀어지는 그러한 정황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미궁을 설계한 건축가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줍니다.
그가 준비한 것은 실타래가 아니었습니다. 밀랍(蜜蠟)과 새의 깃털이었습니다. 그는 함께 갇힌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밀랍을 녹이고 새의 깃털을 다듬어 자신들의 양 어깨에 날개를 달았습니다. 그것은 원인을 좇아 지금을 풀려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원인도 결과도 모두 아우르는 지금 여기의 정황을 통째로 벗어나는 나래 짓이었습니다. 그 비상(飛翔)만이 현실의 극복이라고 여긴 것이고 이를 단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로를 더듬지 않고도 미궁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는 엉뚱한 발상입니다. 흔하지 않은 생각이 아니라 처음부터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인 착상이기도 합니다. 자기 존재 차원의 넘어섬이란 자기를 버리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현실적인 방법이 없습니다.
실타래를 좇는 일은 처음부터 '문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속성 자체에 대한 온전하지 못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과적 접근을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은 실제를 관념 속에 가두면서도 그것을 현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과오를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날개를 달고 나는 일은 그것이 주는 비현실적인 인상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속성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현실 적합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역사는 논리적 귀결을 부정하는 창조적 모티브에 의해서 온갖 난국들이 극복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설명들이 그 극복 이후에 그것을 다시 인과론의 틀 안에서 서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경제가 어려워 온 세상이 들끓고 있습니다. 위기 대처방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테세우스의 방법에 의한 해법의 모색은 범람하는데 다이달로스의 방법에 대해 유념하는 반응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무엇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이달로스가 간과되고 있는 것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날개를 달아야 하는데, 차원의 비약이 모색되어야 하는데, 존재양태의 변화 자체가 논의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 그런데 미쳐 말씀 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에게 너무 낮게도, 너무 높게도 날지 말라고 단단히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이카로스는 너무 높이 날다 태양 가까이 이르러 밀랍이 녹아 날개를 잃고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첨가하면서도 다이달로스가 배제된 테세우스의 풍토 속에서 이 첨언이 꼭 필요한가 하는 회의가 듭니다. 그래도 이를 지우지는 않겠습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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