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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세계경제/ 예금 빨아들이고 대출 틀어막는 은행… 시중에 돈 안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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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세계경제/ 예금 빨아들이고 대출 틀어막는 은행… 시중에 돈 안돈다

입력
2008.10.23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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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예금 금리가 인상됐습니다. 1년 최대 7.4% 관심 부탁 드립니다. OO은행 명동지점"

회사원 최모씨는 22일 이 같은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최근 시중은행들이 7% 전후의 고금리 특판예금을 팔고 있다는 기사는 읽은 적 있지만 설마 국내 1위 은행이라던 이 은행까지 사실상 저축은행 수준의 금리를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즘 은행에게 예금 고객은 '왕'이다.

반면 당장 자금이 필요한 중소기업 사장들은 '찬밥' 신세다. 케이블방송 프로그램 제작업체(PP)인 A사 김모 사장은 최근 정책자금인 디지털방송 전환융자 사업자금을 지원 받기 위해 정부로부터 이 사업을 위탁 받은 한 시중은행을 찾아갔다. 은행은 정책자금 지원이라도 부실에 따른 부담은 은행이 져야 한다며 기술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아 오도록 요구했다. 기보에서는 이 회사의 신용을 문제 삼아 담보를 요구했고, 결국 대출을 받지 못했다.

◇은행의 기능이 마비되고 있다

은행들이 고금리 예금으로 시중자금을 빨아들이고 있지만 정작 기업 대출은 꺼려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0월 들어 정기예금에 10조원이 몰렸지만, 8, 9월 은행들의 중소기업 대출 증가 규모는 상반기 월평균 5조7,000억원에 한참 미달하는 1조8,000억원과 1조9,000억원에 불과했다. 가계와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기업으로 보내는 '혈관' 역할을 하는 은행의 기능이 상실된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은행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는 은행채 시장이 얼어붙은 상태에서 '원화 유동성 비율'을 맞추기 위해서는 예금으로 들어온 자금을 풀기 어렵다는 것, 다른 하나는 중소기업의 연체율이 늘어나고 건설업체 부도 가능성 등으로 리스크 관리에 중점을 둬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단기조달에 장기대출이 문제다

원화 유동성 비율이란 유동성 위기 방지를 위해 도입된 금융 규제로, 만기 3개월 이내 단기부채에 대한 만기 3개월 이내 자산 비율을 100%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 은행에서 부채란 자금 조달을 의미하고 자산이란 대출 자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은행이 유동성 비율을 맞추려면 단기 부채를 줄이거나 단기에 회수할 수 있는 자산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최근 금융시장 불안으로 중장기 은행채 발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자금을 단기로 조달하게 된 반면 대출자산은 대부분 장기이다 보니 유동성 비율을 맞추기가 쉽지 않게 됐다.

최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조치에도 불구하고 은행채 매수세가 실종되면서 은행채 금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고, 덩달아 주택담보대출 금리의 기준이 되는 양도성 예금증서(CD) 금리까지 뛰고 있다. 게다가 올해 말까지 만기로 돌아오는 은행채 규모가 25조원에 달하는데 이에 대한 차환 발행이 안 되다 보니 7%가 훌쩍 넘는 금리까지 제시하면서 예금을 끌어들이고 대출은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유동성 비율의 '단기부채' 범위를 프랑스 등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3개월에서 1개월로 축소해 달라고 금융당국에 요구했고, 당국도 이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우리은행의 경우 유동성 비율이 1%포인트 올라가면 1조원의 추가 대출여력이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한은이 환매조건부채권(RP) 담보증권 대상에 은행채까지 포함시킨다면 은행채에 대한 수요가 회복돼 중장기 자금 조달이 가능해지므로 은행의 대출여력도 크게 늘어난다는 것이 은행 측의 주장이다.

◇은행의 적극성과 당국의 대책이 관건이다

이처럼 만기 불일치 현상이 발생한 데는 은행의 책임도 있다. 은행들은 그동안 외형 확대 과정에서 대출은 1~3년의 장기로 가져가면서 조달은 1개월, 3개월로 하는 등 위기에 대비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신영증권 이병건 연구원은 "물론 나중에 그런 문제를 철저히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면서도 "당장 자금경색이 심화돼 실물 위기로 전이되기 전에 자금이 돌도록 해야 한다"며 당국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편 원화 유동성 문제가 개선된다 하더라도 한계기업에 대한 대출은 쉽게 개선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우량 중소기업이 쓰러지면 은행도 큰 피해를 입기 때문에 이런 기업에 대해서는 최대한 지원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경기 침체기가 되면 부도 우려가 증가하고, 부실이 발생하면 기업뿐 아니라 은행도 부실해지므로 한계기업에 대한 추가 대출은 사실상 어렵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원화 유동성 위기방지 대책 시급하다'란 보고서를 통해 은행 등 금융기관이 재무 건전성이 양호한 기업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대출을 해 줌으로써 금융기관의 책무에 충실해야 하고, 정부도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자금 지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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