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 기억이 생생하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4월 초 은행연합회에 '은행 소액송금 수수료 인하 협조 요청' 공문을 보냈다. 은행들의 반발은 거셌다. 당시 은행 한 관계자는 "말이 협조 요청이지 관치금융의 재연이 나 다름없다"며 "은행들이 손해를 보면 정부가 책임을 져 주는 것이냐"고 했다.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를 압박할 때도, 카드 부가서비스 과당경쟁을 지적할 때도 은행들은 "정부 간섭이 지나치다"고 여론에 호소했다. 그 때마다 기자도 '상대적 약자'인 은행들의 편에서 정부를 적잖이 비판했던 것 같다. 그게 금융 선진화라고 믿었다.
그런데, 최근 은행들의 행동을 보면서 심한 배신감이 몰려온다. 지금 은행 유동성 부족 사태는 국제금융시장 불안이 촉발했다지만, 앞뒤 재지도 않고 오직 탐욕에 젖어 무차별적으로 외채를 들여오고 은행채를 발행한 은행들의 책임도 상당하다. 헌데 무릎을 꿇고 싹싹 빌며 "우리도 모든 노력을 다할 테니 지원 좀 해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정부와 한국은행을 향해 "이대로 망하게 내버려 둘 거냐"고 외려 엄포다. 정부가 결국 19일 외화, 원화 유동성을 대폭 지원하는 대책을 내놓은 것도 '은행이 망하면 기업과 가계, 그리고 결국은 나라 경제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압력에 밀린 결과다. 물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아야 할 판이다.
외환 위기 이후 국민 혈세를 투입 받을 때는 그래도 "정부가 떠밀어서 어쩔 수 없이 부실 대기업을 지원했기 때문"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관치금융이라면 서민을 위한 것이든 중소기업을 위한 것이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려온 은행이 이제는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업종별로는 가장 높은 임금수준에, 다닥다닥 점포망을 늘어놓고 있는 은행권이 앞으로 어떤 자구노력을 할지, 어떤 반성의 자세를 보일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때다.
이영태 경제부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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