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회사 노조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김모씨는 2000년 2월 회사를 상대로 해고무효 소송을 내 같은 해 12월 승소했다. 2002년 2월 항소심에서도 이겼다. 그러나 대법원이 김씨의 복직 확정 판결을 내린 것은 2005년 7월. 회사의 상고가 있은 지 3년 5개월, 첫 소송을 낸 지 5년 5개월 만이다.
김씨는 이후 "대법원이 합리적 이유 없이 선고를 미뤄 복직이 늦어지는 바람에 실직상태에서 생계에 위협을 받고 정신적 고통이 심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1, 2심 패소에 이어 지난달 말 상고심 역시 기각됐다.
"법관이 위법 또는 부당한 목적으로 재판을 지연시켰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바꿔 말하면, 명백한 위법행위가 있지 않은 한 '늑장 재판'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은 없다는 말이다.
■ 쟁점정리만 1년 걸리기도
법원에서 재판이 공회전하는 바람에 제때 법률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피해구제도 늦어진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다. 서민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민사소송의 경우 소송법에서 5개월 이내에 선고토록 규정하고 있지만 10건에 2건 정도는 기한을 넘기는 실정이다. 형사소송에서도 몇 년씩 재판이 이어져 사법판단이 급격한 사회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일반적으로 의학ㆍ과학 등 기술혁신과 관련된 전문 분야의 재판이 특히 지연되는 경향이 강하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논문조작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2006년 5월 사기 혐의로 기소된 후 현재까지 재판이 29차례나 열렸다.
하지만 신청된 증인 100여명 가운데 50여명에 대해서만 심문이 이뤄져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재판에서 황 전 교수가 "일부 과장한 것은 있지만 줄기세포 복제원천기술을 보유한 것은 맞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채택된 증인이 계속 늘어난 것이다.
환경관련 소송 역시 장기재판이 되는 경우가 많다. 환경사건을 전담하는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부장 임채웅)가 법원 내규에 따라 장기재판으로 분류한 사건 중 비행장 소음 관련 소송만 22건이다.
임 부장판사는 "소음도 측정을 위해 해당 지역의 등음선(진원지로부터 같은 정도의 소음피해를 입는 지점을 연결한 선)을 그리는 데만 꼬박 1년이 소요된다"며 "감정작업이 만만치 않은 데다 원고도 수천~수만명에 달해 일일이 확인하다 보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법리 공방이 치열해 재판이 장기화하는 경우도 있다. 2006년 12월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으로 기소된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국장의 재판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다음달 말이나 12월 초 선고가 예정돼 있어 1심 판결까지 꼬박 2년이 걸리는 셈이다. 형사재판의 경우 재판정에서 양측공방을 통해 사실을 확정한다는 '공판중심주의'가 도입된 이후 재판이 지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 신속재판 위한 보완대책 필요
법원은 소송가액 2,000만원 미만의 민사 소액재판은 소장 접수 후 1심 판결까지 1년 이상, 그 이외의 민ㆍ형사 재판은 2년 이상 걸릴 경우 장기미제로 분류, 신속재판을 독려하고 있다.
소송촉진등에 관한 특례법에는 형사사건의 경우 1심은 6개월, 항소심과 상고심은 각 4개월로 소송기간을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9월 말 기준으로 전국의 1, 2심 법원에서 재판기간 2년을 초과한 민사사건은 2,010건, 형사사건은 654건이나 된다.
일선 법관들은 당사자의 연기요청이나 증거조사 지연, 관련사건의 지연처리 등이 장기미제의 주요 원인이며 '고의적인 늑장처리'는 없다고 말한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의 3대 이념은 신속, 공평, 경제의 원칙"이라며 "부득이한 경우엔 '신속'을 희생시키더라도 '공평'을 최우선에 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건 당사자의 방어기회를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재판 지연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 다른 판사도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법언(法諺)에 공감하지만 이는 정확한 판결이라는 점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나름대로 이유를 대지만, 재판 지연으로 인한 소송 당사자들의 피해를 감안하면 보다 신속한 재판을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법원은 신속ㆍ정확한 재판을 위한 제도적 보완장치로 지난해 8월 '전문심리위원 제도'도 도입했다.
첨단산업, 국제금융 등 관련 사건의 재판부나 당사자의 신청이 있을 경우 해당 분야 전문가를 재판에 직접 참석시켜 조언을 구하는 제도다. 그러나 운영실태를 보면 아직까지 의료나 건축 등 특정분야에 편중돼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재판 지체 사유가 해소되는 즉시 재판장이 확인할 수 있도록 올해 2월 전산시스템을 구축해 장기미제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며 "1년 전보다 장기미제가 400여건 감소했으며, 재판기간 단축을 위한 대안을 계속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김정우 기자 wookim@hk.co.kr
권지윤 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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