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변이었다.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리 있는 답변이 막힘 없이 쏟아졌다. "독서를 좋아해서 그런지 말을 잘 한다"는 한 영화인의 전언은 틀림이 없었다. 본인도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단지 외모와 본능에 의존하는 연기자라기보단 머리로 캐릭터를 우선 설계한 뒤 감정에 내맡기는 배우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 일까. 손예진은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자신의 몸을 빌린 인아 역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고 했다. "(동명의 원작)소설이 정말 재미있고, 흥미롭고, 유쾌하고, 축구와 사랑이야기를 엮어내는 독특한 상상력이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시나리오가 나오니 (출연)해야 할지 고민이 앞섰다"고 한다.
사실 그 누구라도 당혹스러워 할 역할이다. 남편이 있는 데도 버젓이 외간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두 집 살림을 한다. 그렇다고 자기의 '기행'(奇行)을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남성을 파괴하는 요사스러운 팜므 파탈도, 위선으로 똘똘 뭉친 악녀도 아니다. 그저 남들보다 사랑이 넘쳐 흐르고, 그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연애전선에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프랑스혁명 이념을 적용하려는 인물, 자신의 순수한 욕망에 집착하면서 역설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모순된 공리주의자라고 해야 할까.
"배우는 100%는 아니어도 최대한 맡은 역할을 자기화해야만 하지만 이번에 그렇지 못했어요.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남편을 두고)다시 결혼하는 인아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소설을 읽을 땐 유쾌하고 발칙하다며 재미를 느끼지만 영화는 다르잖아요. 캐릭터들이 실제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살아 숨쉬는 사람이 돼야 하니까요.
손예진이라는 사람의 가치관과 인아라는 설정된 가치관 사이에서 참 많이 싸웠던 것 같아요. 그냥 최대한 인아라는 사람을 많이 상상했어요. 아마 외국생활을 많이 했을 것이고, 집시적인 사고방식의 외국인과 진한 사랑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혹시 두 남자를 동시에 마음에 품은 적은 없냐"고 슬쩍 물었다. "없다"고 했다. 그러나 "잠시 기로에 선 적은 있었다. 사귀는 사람이 있을 때 누군가 저를 좋아해서 약간 묘한 흔들림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성격이라서 그 상황서 그쳤다"고 선을 그었다.
올해로 만 26세. CF로 데뷔한지 만 9년이다. 이혼녀, 소매치기, 기자 등 최근 들어 동년배에 비해 넓은 진폭의 역할들을 소화하고 있다. 물론 그도 신인 무렵엔 시한부 삶을 사는 비련의 여인 역할로 한정됐다. "왜 매번 아픈 역할만 하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앞으로 할 역할도 많고 나이가 들면 더 깊은 연기를 할 수 있을 텐데"라는 반감도 들었다.
2005년 '작업의 정석'이 탈출구가 됐다. "지금은 몇 년 전과 달리 '너는 예쁜 역만 한다'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멜로 장르가 저에겐 편한 듯 해요. 멜로를 많이 해서도 그렇고 사랑이야기를 워낙 좋아해서요. 호러, 미스터리는 저랑 안 맞고요. 여배우가 멜로와 어울린다는 말은 좋은 칭찬이니 멜로 이미지는 끝까지 가지고 가고 싶어요."
지난 봄 TV드라마 '스포트라이트'가 시청자의 외면을 받았을 땐 "가슴이 아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지나고 나니 살과 피가 되는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제가 원래 굉장히 부정적인 성격이에요. 그게 싫어서 제 스스로 긍정적이 되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요. 그래야 제가 힘들지 않고 마음이 다치지 않잖아요."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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