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연명하고 있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17일 경기 용인시 원삼면 맹리 용인통합미곡처리장(RPC). 500∼600㎏ 무게의 물벼(말리지 않은 벼) 포대를 3,4개씩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포크레인이 포대를 들어올릴 때마다 차가 '쩍' 소리를 내며 휘청거린다. 불과 3,4시간 만에 3,000㎡ 넓이의 앞마당이 쌀자루로 가득 찼다.
수매는 이달 중순부터 말까지 진행된다. 각 동네별로 수매일정도 통보됐다. 하지만 농민들은 앞다퉈 벼를 수확해 미곡처리장으로 몰려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수매대금을 받아 빚을 갚음으로써 대출 이자라도 아끼겠다는 심산이다. 이 같은 사정을 반영하듯 농민들의 주름진 얼굴에서는 미소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미곡처리장은 물벼의 미질과 수분함량을 검사해, 말렸을 때를 기준으로 수매대금을 제공하게 된다. 수매가는 특등 40㎏ 한 포대에 6만원, 1등급 5만8,200원이다.
올해는 태풍이 비켜가면서 일조량이 많아 생산량이 10∼20%가량 늘었고, 대부분 특등급을 받을 것으로 보여 농심이 반색할 만도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전혀 아니다.
이 근처에서 논 50마지기(3만3,000㎡)와 밭 3,000㎡를 경작한다는 이정표(50)씨는 "비료값, 기름값이 엄청 올라 빚 갚고 나면 몇 백만원이라도 손에 쥐게 될지 모르겠다"면서 "두 아이가 대학에 다니는데 등록금은 따로 변통하려고 마음 먹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나마 자신은 콤바인(벼를 베고 동시에 탈곡하는 기계)을 갖고 있어 사정이 나은 편이라면서 콤바인도 없는 이삼십 마지기 농사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농사를 계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형편을 펴보겠다며 낙농을 겸업했던 농민들은 이번 고유가파동과 국제금융위기로 이중의 타격을 받았다. 벼농사를 지으면서 비료, 기름값에 왼쪽 뺨을, 낙농을 하면서 사료값에 오른쪽 뺨을 맞은 것이다.
논 30마지기(1만9,000여㎡)와 젖소 140마리를 키운다는 김길수(52)씨는 "한 차에 130만원 하던 사료값이 190만원으로 뛰어 입 하나라도 덜어볼 심산에 송아지를 헐값에 내놓았는데도 아무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5,000만원 한도의 마이너스 통장은 이번 수매대금으로 갚는다고 쳐도 내년에는 아무래도 한도를 늘려야 할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용인시 백암면 용천리에서 논 50마지기와 한우 15마리를 키우고 있는 박관선(50)씨도 "벼 농사는 그렇다 쳐도 한우를 키우면서 손해를 많이 봐 대학 다니는 남매가 어서 졸업하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논 농사를 50마지기나 짓는다면 부농(富農) 아닌가? 하지만 농민들의 얘기는 달랐다. "수도권 농민들은 거의 다 서울 등지에 사는 부재지주의 토지를 임대해 농사를 짓는다고 봐야 한다"면서 "적자에 허덕이면서도 직불금은 지주에게 바치고, 검사라도 나오면 본인이 받은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 한다."
사정은 다른 지역도 비슷했다. 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청남농협미곡처리장. 물벼의 중량과 수분 함량을 나타내는 계기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학영(54)씨는 "풍작이면 뭐해…배보다 배꼽이 더 큰데"라고 퉁명스럽게 혼잣말을 했다.
그는 "소출은 좀 늘었지만 생산비 다 제하고 나면 논 10마지기(6,600㎡)에서 남는 건 고작 150만~200만원 뿐"이라며 "이제 진짜 농기계를 중고 시장에 내다 팔고 다른 길을 알아봐야 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벼가 가득 실린 트럭에 앉아 수매를 기다리던 오상신(50)씨는 영농비가 폭등한 실상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핏대를 올렸다. "올해 들어서만 복합비료는 63%, 농약값은 80%, 면세유는 꼭 2배 뛰었는데 계산서가 나오겠습니까?"
그는 20마지기(1만3,000㎡)에서 약 400만원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 대학생과 고교 3학년인 두 자녀의 한 학기 학비도 안 되는 액수다. 부인은 내년에 진학할 둘째의 입학금을 마련해보겠다고 청주시내의 조그만 공장에 나가고 있다.
수확을 마무리하는 대로 자신도 날품팔이를 시작할 작정인 그는 "아내가 자꾸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소리를 해 가슴이 미어진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옆에 있던 오인수(74)씨는 "우리 마을에서는 빚 없는 농사꾼이 거의 없다"면서 "이러다 젊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장년층들도 모두 고향을 떠날 판"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시무룩한 농민들을 보는 미곡처리장 직원들의 표정도 어두워 보였다. 인동주 미곡처리장 상무는 "최악의 상황에 몰린 농민들을 생각하면 수매가를 최대한 올려줘야 하는데 농협 입장에서도 그럴 수가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이라고 말했다.
수매장에 나온 농민들은 하나같이 정부에 대한 섭섭함을 강하게 표시했다. 청원군 가덕면 박모(53)씨는 "적어도 150∼200마지기는 해야 채산성이 생기지?농민들이 무슨 수로 규모의 영농을 하겠냐"면서 "수매가 결정도 농협에만 떠넘기면서 말로만 농민을 위한다고 하는 정부와 정치권이 원망스럽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쌀전업농연합회 등 청원지역 7개 농민단체들은 쌀 생산비 보장을 위해 청원군과 군의회가 포대당 장려금을 2,000원씩 지급해주고 수매가 6만원을 보장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수매거부에 이어 농협미곡처리장 봉쇄 투쟁까지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청원=한덕동 기자 ddhan@hk.co.kr
용인=이범구 기자 gogu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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