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하다. 손님도 아닌 데, 주인도 아닌 데 매일같이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매장을 왔다 갔다 한다. 말쑥한 정장차림에 가끔 수첩을 꺼내 들고 뭘 적는가 싶더니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손님들을 유심히 살피는 것도 모자라 종업원에게 이것저것 따지기도 하고 훈수도 둔다. 잔소리꾼이 따로 없다.
급기야 며칠 뒤 두툼한 자료를 펼쳐놓고 매장 주인을 불러 앉힌다. "매출이 떨어지고 있죠? 6개월 됐는데 매출이 40%나 빠졌군요. 다른 식당은 다 오르는데…." 섬뜩하다. 장부라도 뒤진 걸까. 가까스로 손익은 맞추고 있었지만 안 그래도 몇 달간 명치끝을 눅진하게 누르던 고민거리였다. 점쟁이가 따로 없다.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그가 꺼내놓은 자료엔 품목(요구르트 아이스크림)에 대한 시장분석, 상권 조사, 쇼핑몰 유입인구 현황, 매장의 서비스 및 영업방식, 진열상태(디스플레이), 주인과 종업원의 태도 등에 대한 내용이 촘촘히 녹아있었다. 과학적인 컨설팅 앞에 주인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결국 업종을 변경했다. 칼국수 집, 라면전문점, 일식전문점 등의 제안 중 주인은 칼국수를 택했고, 이후 매출은 150%나 늘었다. '수익 천사'가 따로 없다.
그(혹은 그녀)의 정체는 '리테일 마케터'(Retail Marketer). 생소한 단어 조합만큼 설명도 장황하다. 쇼핑몰 상품기획(MD) 구성, 프로모션 기획, 이벤트뿐 아니라 임차인을 컨설팅해 쇼핑몰의 컨셉트를 유지하고 부동산 가치를 높이는 직업이란다. 굳이 간단히 풀면 '유통+부동산 마케터'라고 할 수 있다. '두 마리 토끼'(소속된 회사 수익+임차인의 이익)를 잡아야 하는 고된 일이기도 하다.
국내에선 아직 희귀한 직종이다. 리테일 마케터의 세심한 손길은 계약기간이 정해져 있는 '임대형' 쇼핑몰에서 빛을 발하는데, 국내엔 일단 분양만 받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장 주인의 책임에 속하는 '분양형' 쇼핑몰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해외 유명 쇼핑몰은 임대형이 많지만 국내에는 서울의 코엑스몰, 용산 아이파크몰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점에서 경기 부천시 중동의 임대형 쇼핑몰 '디몰'(The Mall)의 리테일 마케터 이한기(36) 팀장과 이지영(35) 과장은 국내 리테일 마케팅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거창한 수식어만큼 업무도 화려할까.
"임차인(점주)과 체육대회 야유회도 하고, 목욕탕 가서 등도 밀어줘야 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와 계약사항이 얽힌 임차인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선 정성이 필요하죠. 힘들어요."(이 팀장) "매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제 돈 들여 매장에 상주하고, 가끔 종업원들이나 점주 일에 사사건건 관여도 해야 하죠. 임대료만 챙기면 된다는 생각은 오산이죠."(이 과장)
제각각 따로따로 노는 분양형 쇼핑몰에 익숙한 임차인을 한데 모으고 쇼핑몰의 색깔을 확립하기위해선 관계개선(TR)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둘은 TR을 위해 벌써 몇 년째 공을 들이고 있다. 연말엔 분야별(몰 전체 기여도, 베스트 매장, 고객이 뽑은 매장 등)로 임차인 시상식까지 열고 있다. 덕분에 재계약 답변 비율이 96%에 이른다고 한다.
마음을 얻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과학적이고 꼼꼼한 분석이 받쳐주지 않으면 약 100개 매장의 '심리적 연대'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이다. 그래서 리테일 마케터는 첨단 장비와 수학 및 통계에 대한 지식으로도 무장해야 한다.
'트래픽 카운트 시스템'(TCS)이 대표적이다. TCS는 출입 고객 수를 시간, 일, 요일로 나눠 측정할 뿐 아니라 날씨에 따른 유동인구 변화도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층별, 혹은 매장별로 고객의 많고 적음을 따져 이후 디스플레이 변화, 업종 변경 조언 등의 컨설팅에 적용하는 식이다.
통계자료를 다루는 전산관리가 전직이었던 이 팀장은 "(TCS는) 실시간 집계가 가능하기 때문에 각 매장의 매출 신장을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계자료와 매출장부 분석도 리테일 마케터의 몫이다. 상권 파악을 위해 매일 쇼핑몰 내부의 매장뿐 아니라 바깥의 주변 상가도 직접 조사해야 한다. 가슴(TR)과 두뇌(수학적 분석능력), 발(상권조사)의 삼박자가 조화를 이뤄야 하는 셈이다.
이를 통해 임차인의 이익과 회사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장기적으로 쇼핑몰의 부동산 가치를 높여 다시 임차인의 매출 및 회사의 임대료 수익(혹은 임대율)을 늘리는 선순환 구조 정착이 리테일 마케터의 존재 이유다.
열심히 일해도 사실 표는 잘 안 난다. "부동산에 유통적인 시각을 접목한 거라 사실 회사 경영진도 잘 이해를 못할 때가 많아 속상하다. 임차인들도 가끔 우리 시스템을 통제로 여기기도 한다."(이 팀장) "단순히 프로모션만 하면 단기간에 매출 업적이 금방 드러날 텐데, 우리 일은 꾸준히 장기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바로 숫자나 성과가 나오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다."(이 과장)
그래도 불만은 없다. 아직 세상이 몰이해하고, 당장 회사가 몰라주고, 가끔 임차인이 오해해도 자부심은 팔팔 뛴다. 이 과장은 "리테일 마케터에 대한 개념도 없던 8년 전 태국 쇼핑몰을 보고 아련하게 꿨던 꿈이 차근차근 실현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더구나 "쇼핑몰이란 하나의 생명체를 살아 숨쉬게 하고 발전시키는 나는 쇼핑몰의 지휘자니까."(이 팀장)
▦리테일 마케터의 역할 구조
마케팅 기본 업무(프로모션 및 이벤트, 상품 기획)+임차인 관계개선(야유회 체육대회 시상식 등)→각 매장 방문조사 및 매출 분석→쇼핑몰 유입인구와 매출 상관 관계(TCS) 및 각종 통계 분석→주변 상권 조사→매출 부진한 매장 컨설팅(디스플레이 변화, 업종 변경 등)→매장 매출 향상→쇼핑몰 이미지 개선→쇼핑몰 부동산 가치 상승→임대료 및 임대율 상승→회사(쇼핑몰) 수익 증가
부천=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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