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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대북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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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대북특사

입력
2008.10.1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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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은 극한대결 상황일수록 대화의 통로를 열고자 노력했다. 대한적십자사는 분단 후 최초로 1971년 8월 북측에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했다. 3년 전 1ㆍ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으로 남북긴장이 최고조에 달해 있던 시기였다.

다음해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났다. 여차하면 자결하려고 극약을 소지한 채였다. 같은 달 북측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했다. 그 결과물이 '7ㆍ4남북공동성명'이다. 서로 체제유지에 이용하는 바람에 빛이 바랬지만 이 성명은 남북대화의 중요한 초석이 됐다.

▦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대리인이었던 두 사람은 대북 특사라기보다는 밀사에 가까웠다. 남북관계가 공개적으로 특사를 파견할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황 탓이었다. 5공 시절 미얀마 아웅산 사건에서 살아남은 전두환 대통령도 남북정상회담 논의를 위해 장세동 안기부장을 밀사로 평양에 파견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6공의 황태자' 박철언 대통령 정책보좌관과 서동권 안기부장이 바통을 이어 대북밀사로 활약했다. 5, 6공의 밀사들은 통일방안 등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시켰지만 정상회담을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 2000년 6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 성사는 대북밀사 활동의 결과물이다. 회담합의 과정에는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장관이, 준비과정에는 임동원 국정원장이 활약했다. 임 원장은 2002년과 2003년에는 정식 대북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6월 정동영 통일부장관도 대북특사 자격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경색됐던 남북관계와 6자회담의 돌파구를 열었다. 지난해 2차 남북정상회담 전후에는 김만복 국정원장이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대북특사 임명장을 받아 평양을 드나들었다.

▦ 미국이 테러지원국명단에서 북한을 제외하면서 이명박 정부 들어 경색된 남북관계 복원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정부여당 내에서는 벌써부터 대북특사 얘기가 나왔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힘을 받지 못했다. 지난 7월에는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특사 파견을 이 대통령에게 건의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적임자로 박근혜 의원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이 대통령의 시큰둥한 반응으로 내부 분란만 부른 꼴이 됐다. 이제는 남북관계 전문가그룹에서도 특사 파견을 통한 돌파구 마련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아직 망설이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계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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