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15일부터 열리고 있다. 올해는 우리나라 출판사들의 참가 열기가 예전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 출판 경기 침체에 환율 문제까지 겹쳤기 때문이리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참가한 출판사 관계자들이나 참관하는 개별 출판인들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를 바란다.
도서전이 열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가까운 유서 깊은 도시 마인츠에는 구텐베르크 인쇄박물관이 있다. 1900년에 구텐베르크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박물관으로, 서양 인쇄 문화의 원류와 변천 과정을 잘 알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박물관 안내 책자를 구입할 수 있는데 영어판, 독어판, 불어판, 서반아어판, 일어판 등이 있고 각 판의 내용은 같다. 인쇄 문화와 역사에 관한 한 우리나라가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안내 책자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초의 금속제 활자를 만든 것은 아마도 한국이다.'
그런데 '아마도'라는 표현이 자꾸 걸린다. '어시책'(御試策)이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과,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旨心體要節)'이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나라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안내 책자에서 일본의 인쇄 역사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제법 자세하다. '특제 케이스에 전시 중인 귀중한 아이템들 가운데는 일본 나라(奈良)시대(710~794)에 만든 두루마리 다라니경이 있다. 그것은 목판으로 인쇄되었으며, 전통적으로 그렇듯, 작은 목제 불탑에 보관되었다. 770년경에 완성된 이 다라니경은 세계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목판 인쇄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에 관해서는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안내 책자를 접하는 많은 세계인들은 결국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을 현존 최고의 목판 인쇄물로 알기 십상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66년 불국사 석가탑 탑신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51년 이전에 만들어진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안내 책자의 내용을 두고 전적으로 사실(史實)과 다르다고 하기는 힘들고 박물관 측의 책임을 따져 묻기도 힘들다.
문제의 안내 책자는 어디까지나 박물관 안내 책자이기 때문에, 그 전시물인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복제본)만 설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지금이라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복제본을 박물관 측에 기증하여 한국 전시실에서 정확한 설명문과 함께 전시하도록 할 수는 없을까?
안내 책자에 관해서도 생각해볼 점이 있다. 안내 책자 일어판은 일본 굴지의 종이 및 인쇄 기업인 톱판인쇄(Toppan Printing)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톱판은 도쿄(東京) 분쿄(文京)구에 인쇄 박물관을 건립하여 운영 중이기도 하다. 톱판은 일어판 안내 책자 끝 부분에 인쇄 박물관 안내 광고도 실었다.
한국인 관람객이 워낙 적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어판 안내 책자는 없다. 세계 최고를 주장하기에 앞서, 그런 주장이 설득력 있게 보다 널리 다가갈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방안을 강구하고 실천하는 것. 문화강국이란 이런 노력에 능한 나라일 것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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