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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수해 딛고 재개방 남설악 흘림골, 가슴 찡한 '붉은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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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수해 딛고 재개방 남설악 흘림골, 가슴 찡한 '붉은 아우성'

입력
2008.10.17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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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인제를 지날 때면 빼놓지 않고 한계령 근방을 둘러보았다. 양희은의 청아한 목소리로 퍼지던 노랫가락 속 아름다운 한계령이 얼마나 제 모습을 찾아가는지 궁금해서였다. 재작년 여름 끔찍한 물폭탄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차고 넘쳤던 한계령의 아픔이 얼마나 치유됐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올 가을 깔끔히 정리된 한계천을 지나 핏빛 단풍이 스며드는 한계령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정상에서 절정을 이룬 단풍은 매섭게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오른쪽 남설악의 만물상 위로 시선은 저절로 고정됐다. 오전의 역광으로 눈부신 그곳에 흘림골의 비경이 숨어 있다.

흘림골은 1985년부터 20년간 자연휴식년제로 출입이 통제됐다가, 2004년 가을 문을 연 남설악의 진경이다. 그리고 두 해 단풍의 아름다움을 뽐냈던 흘림골은 2006년 수해에 다시 문을 닫아 걸어야만 했다. 등산로 복구에 긴 시간이 필요했고 올해 초에야 일반에 다시 공개됐다. 이번 단풍은 흘림골의 3번째 버전. 폐허 위에 피어난 핏빛 축제다.

한계령휴게소에서 양양 방향으로 3km 내려오면 흘림골 탐방통제소가 나온다. 산행의 시작점이다. 남설악 칠형제봉과 만물상 사이 꼭꼭 숨은 골짜기, 흘림골의 산행은 쇠로 만든 계단길로 시작된다.

새로 조성된 철제 계단엔 걷기 편하도록 고무 매트가 깔려있었다. 등산로 옆으로 난 계곡은 지난 수해가 어떠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집채 만한 바위가 굴러 내려와 박혔고, 뿌리째 뽑힌 아름드리 나무들이 널브러졌다. 저 많은 흙과 바위가 쓸려 내려왔으니 산은 또 얼마나 작아진 걸까. 흘림골이 제 육신을 찢어내고 피워낸 단풍이다.

한 무리의 등산객이 앞질러 오른다. 포행하는 수도승처럼 한발 한발 귀 기울이는 묵언의 산행이다. 빨간 셀로판에 투과된 듯한 불그레한 바닥을 쳐다보며 오르고 또 오른다. 걸음이 힘들 때면 뒤돌아 등 뒤 칠형제봉의 우람한 위용에서 새 힘을 얻는다.

여심(女深)폭포에 다다랐다. 특별한 팻말도 없지만 이곳이 왜 여성의 깊은 곳이란 이름을 얻게 됐는지를 알게 된다. 여성들은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입가에 미소를 짓는 남정네들도 계면쩍게 만드는 풍경이다. 70년대 설악산이 최고의 신혼여행지였을 때 여심폭포는 신혼부부가 반드시 들러야 하는 명소였다.

이 폭포의 물을 받아 먹어야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당시 신혼여행 복장이 그랬다) 신부와 신랑이 여심폭포로 몰려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여심폭포 위로는 더 가파르다. 등선대에 이르는 깔딱고개다. 더는 못가겠다고 큰 숨을 몰아 쉴 때 만물상의 꼭대기인 등선대에 다다른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기암괴석의 바위 봉우리를 오르면 호흡이 멎을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사방 남설악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뾰족바위가 연봉을 이룬 만물상이 발아래로 장쾌하게 펼쳐진다. 칠형제봉들과 그 너머의 한계령 휴게소에서 시작해 귀때기청봉을 지나 대청봉에 이르는 설악 서북주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기암의 바다, 붉은 단풍의 바다 위로 열기구를 타고 둥실 떠오른 듯 황홀하다. 모두들 함박 웃음이다. 이전 등선대는 좁아서 2,3명만 올라설 수 있었다. 복구 과정에서 널찍한 전망대가 갖춰져 이젠 여럿이서 흘림골의 절경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등선대부터는 내리막길이다. 단풍 물든 기암과 기암 속으로 걷는 길이다. 목마른 가을이라 계곡의 물들이 바짝 말랐다. 등선폭포 십이폭포를 지나는데 물줄기는 가늘게 졸졸거릴 뿐이다. 길은 금강문 인근에서 주전골 탐방로와 만난다. 여기서 용소폭포탐방지원센터까지는 500m, 오색약수까지는 2.7km다.

흘림골 단풍만으로도 크게 만족해 용소폭포쪽으로 짧게 산행을 끝낼 수도 있지만 힘이 남는다면 주전골의 아늑한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으며 오색까지 내려가 보자. 흘림골과 달리 계곡이 급하지 않아 제법 많은 물을 담고 있다. 금강문, 선녀탕, 성국사 등을 지나는 이 길은 발걸음도 편하다. 계곡에 담긴 빨간 설악이 몸으로 젖어드는 길이다.

■ 여행수첩/ 흘림골

●흘림골 입구는 한계령휴게소에서 양양방향으로 3km 아래에 있다. 승용차 4,5대 댈 공간만 갖추고 있어 주차가 쉽지 않다. 더 내려가 오색분소나 용소폭포탐방지원센터에 차를 대고 택시나 히치하이킹을 통해 이곳에 되올라와 산행을 시작하는 게 좋다.

●흘림골 입구에서 용소폭포탐방센터까지는 4km. 약 2시간 30분이 걸린다. 흘림골에서 오색약수까지는 6.2km로 3,4시간 걸린다.

●흘림골에서 가까운 오색약수나 필례약수 인근에 산채를 주메뉴로 한 음식점들이 몰려있다.

●트레킹 전문인 승우여행사는 19, 25, 26일 출발하는 당일 일정의 흘림골 주전골 단풍 여행 상품을 출시했다. 점심 식사 포함 참가비 4만1,000원. 오전 7시 광화문에서 출발한다. (02)720-8311

흘림골(양양)=글·사진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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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띄우는 편지/ 흘림골 단풍

산으로 떠나는 것은 자연을 접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삭막한 도시의 잿빛 풍경 대신 변화무쌍한 자연의 색을 보고, 시끄러운 엔진과 경적 소리 대신 마음에 위안을 주는 물소리 새소리를 듣기 위해서겠죠.

흘림골 단풍의 감격을 곱씹으며 등선대에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계곡을 쩡쩡 울리는 노랫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목청 큰 중년 사내의 깊고 걸쭉한 노랫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등선대에서 정상주라도 한 잔 걸치셨는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더군요. 도무지 그치지 않는 노래, 그 분에게는 흥이었을지 몰라도 저에겐 스트레스였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길을 내주고는 그 노래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곤 옆을 스치는 산행객들의 대화를 조금씩 엿들어 봤습니다. 중간 중간 "와 좋다"는 짤막한 감탄사를 터뜨리는 거 말고는 대부분의 화제가 도시에서의 고민들로만 채워지더군요.

아파트값 이야기에 새소리가 그쳤고, 주식 이야기가 물소리를 멎게 했고, 대통령을 논하는 목소리에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간만에 나온 단풍 구경일 텐데 모두들 일상의 짐들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지를 못합니다.

다람쥐가 밟는 바스락 낙엽 소리, 마른 참나무 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하얀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우리네 삶이 너무 각박해졌기 때문일까요. 아님 자연의 소리를 듣는 방법을 잊어먹은 건가요. 자연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산을 찾았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모습들이 처량해보이기까지 하더군요.

불쌍한 건 사람들만이 아닐 겁니다. 사람들의 소음으로 자연은 또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까요. 20년간 자연 휴식년제를 보낸 흘림골이 이번엔 '소리 휴식년제'를 보장해달라며 아우성치진 않을까 괜한 걱정이 들었습니다.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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