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가 미국의 유일 패권적 지위를 흔들어 놓고 있다. 역사상 가장 견고한 금융제국을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미국이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신용위기로 철옹성에 금이 가면서 로마제국, 대영제국이 그랬듯 강대국 흥망 주기를 따르고 있는 것 아니냐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본격적인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는 주장과 아직 쇠망을 말하기에는 미국의 시스템이 견고하다는 견해가 어지럽게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시대는 저물었는가
뉴욕타임스(NYT)는 12일 20세기 초 영국 상황이 이라크 전쟁과 경제위기 속에서 대선을 앞두고 있는 미국의 현 상황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고 보도했다. 1905년 보어전쟁이 끝난 이듬해 30년을 집권하면서 대영제국을 이끌던 보수당은 진보적인 자유당에 대패했다. 하지만 자유당 정부는 경제를 살리지 못했고 40년도 되지 않아 미국에 세계 패권을 넘겨줬다.
이란, 베네수엘라 등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뿐 아니라 유럽 국가들도 '미국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입을 모은다. 피어 스타인브뤼크 독일 재무장관은 "미국은 국제금융에서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존 그레이 전 런던정경대학 교수는 영국 옵서버에 기고한 글에서 "폴슨 장관이 무릎을 꿇고 있을 때 중국 우주인은 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는 표현으로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강대국의 등장을 예견했다.
금융뿐 아니라 미국을 지탱하던 이념까지도 흔들리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역사의 최후단계라고 주장했던 프란시스 후쿠야마 미 존스홉킨스대학 교수는 뉴스위크(13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근간인 민주주의도 위기를 맞았다고 전했다. 그는"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민주주의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오용됐다"며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의 포로학대, 고문 등으로 얼룩져 이제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의 상징으로 보는 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신흥 세력의 등장과 8월 그루지야 전쟁 이후 러시아의 화려한 재부상 등 미국에 대한 탈 동조화 현상도 심상찮다. 석유를 앞세운 중동 또는 현금을 앞세운 중국 등 개도국이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리라는 예측이다. 중국, 이란, 러시아 등의 남미 국가와의 전략적 제휴 등으로 미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권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흥망을 논하기는 이르다
미국의 지위가 도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쇠망을 논하기는 성급하다는 반론은 여전히 대세다. <미국의 시대> 저자인 로버트 리버 조지타운대 교수는"미국은 군사력, 경제규모, 생산성 등에서 월등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나톨 리벤 킹스칼리지 교수 역시"미국의 쇠망이라기보다는 시장 자유화를 내세우는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census)의 쇠망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미국이 여전히 우위를 점하는 가운데 권력이 더욱 다극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BBC 방송은 "신보수주의자(네오콘) 인사들조차도'다극화 시대'의 도래를 예견했다"고 전했다.
이라크 전쟁 후유증에 금융위기가 겹치면서 일시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영국 소재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로빈 니블릿은 "조지 W 부시 정부 하에서 쇠락 요인이 많았다"며 "미국의 구조적 문제라기보다는 부시 대통령의 실정 탓"이라고 말했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9일"부상하는 신흥 세력 중 미국의 대안은 없다"며 "미국이 국제적 금융 위기 극복을 위해 어떤 지도력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고 전했다.
낙관론을 펼치는 이들은 미국의 막강한 '인력풀'을 첫번째 근거로 든다. 미국은 여전히 고학력 이민자들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인 난부 요이치로(南部陽一郞ㆍ물리학상) 시모무라 오사무(下村脩ㆍ화학상) 첸융젠(錢永健ㆍ화학상) 등이 미국 국적이거나 미국에서 연구활동을 한 데서 볼 수 있듯 미국은 인재들을 모아 들이는 블랙홀 역할을 하고 있다.
'강대국의 흥망'의 저자인 폴 케네디 미 예일대 교수 역시 비슷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는 12일 영국 선데이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에 대해 강대국 흥망 주기설을 꺼내기에는 이르다"며 "미국은 전 세계 생산의 20%, 군사 지출의 50%를 차지하며, 최고 수준 대학에서 연구개발투자가 진행되는 등 확고한 '백업(backup) 체제'를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지향 기자 jh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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