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전투는 公器로서의 언론을 空氣정화 하는 마음으로 펼친 것"
굳이 직접 만나자고 했다. 오한흥(50) 전 옥천신문 대표. 서울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인 충북 옥천군에 사는 그이니, 이메일 인터뷰가 피차 편한데도 꼭 서울 오는 날 얼굴 보고 얘기하자 했다. "한쪽으로 쏠리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이 있어요. 세상이 다 온라인쪽으로 쏠리는 것 같아서… 요즘은 이메일도 잘 안 열어봐요. 시골에서 농사 짓고 집 지으며 살아서 더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언론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옥천신문'이라는 매체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한흥이라는 이름도. '옥천전투'라고까지 불린 안티조선(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고 육영수 여사의 고향인 농촌 마을 옥천에서 이끌었던 그다. 그의 삶과 꿈이 <고삐 풀린 망아지, 옥천에서 일 내다> (정지환 지음ㆍ푸른나무 발행)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고삐>
"농촌에서 언론운동을 한 이유요? 지역 운동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일이 있겠죠. 집을 짓는 데 비유하자면, 언론은 그 집에 도는 기운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집을 잘 꾸며 놔도 삿된 기운이 돌면 흉가가 될 겁니다. 제가 한 일은 집(지역)의 공기를 깨끗이 한 거죠. 옥천신문을 만든 것도 안티조선 운동을 펼친 것도 다 그런 까닭입니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지역 운동에 뛰어든 인물처럼 생각되지만, 오씨는 사실 옥천 토박이다. 학력도 중학교 중퇴. "교만이 하늘을 찔러 일찌감치 제도교육을 작파"했다고 한다. 책에는 10대 시절부터 "술, 담배, 연애를 섭렵한" 그의 과거가 솔직히 드러나 있다. "비판적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불행하게 살지는 않겠다"는 의지만큼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농촌 집짓기 사업과 주간지 '여의도 통신'을 발행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요즘도 그 에너지는 여전해 보였다. 오 전 대표는 특유의 직관적 표현으로 광우병 문제에서부터 작금의 금융위기까지 콸콸 말을 이었다. "광우병의 핵심은 소가 소를 먹어서 미쳐버린 것 아닌가요. 나는 금융위기의 원인은 결국 자본이 자본을 먹어 미쳐버렸기 때문이라고 봐요. 자본은 노동을 먹어야 하는 건데…." 그 에너지가 있는 한, 옥천은 오래도록 건강한 곳으로 남을 듯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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