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전박대요? 수도 없이 당해봤죠."
쉽지 않았다. 편견과 무관심으로 얼룩진 이들 마음의 문턱을 넘기란.
서울시립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 인식개선팀에서 근무하는 임경억(45) 홍보실장.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 개선 운동을 펼치고 있는 임 실장에게 문전박대는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서울시립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운영하고 있는 위탁 기관이다.
그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초ㆍ중ㆍ고교와 중앙행정기관 및 지방자치단체를 직접 찾아 다니며 학생들이나 해당 소속 직원들을 대상으로 세미나와 장애체험스쿨 등을 통해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 개선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임 실장이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올해로 5년째. 늘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 보지만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하는 이들은 드물다. 예전에 비해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세미나를 위해 각급 학교나 공공기관을 섭외 하려고 문을 두드리는 날이면 '혹시나 세미나를 핑계 삼아 또 무슨 후원금 같은 것을 뜯어 내려고 온 것은 아닌가?'라는 표정으로 그를 대하는 게 보통이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일반 시민들에게 장애인들에 대한 인터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멘트부터 시작하잖아요. '장애인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을 더 마련해야 한다'는 등 많은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 장애인들의 쉼터를 마련한다고 하면 그럴듯한 갖가지 명분을 내세우면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죠." 임 실장은 장애인들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이렇게 설명했다. 겉으론 장애인들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돌아선다는 것이다.
거절 당했을 때의 기분이야, 임 실장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도 34년 전, 양쪽 눈의 시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아픔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운동장에서 축구공으로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눈을 강타 당해 실명한 다음부터, 그에게 시각적으로 남아 있는 기억은 별로 없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이야기를 꺼내 보지도 못하고 거절을 당한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잖아요. 물론,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말이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임 실장의 말꼬리는 흐려졌다.
장애인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의 벽이 높다는 걸 잘 알기에, 임 실장은 자신이 직접 나서 어릴 적 선생님이 되겠다던 꿈도 접은 채 인식 개선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 곳곳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을 걷어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앞장서서 장애인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공공기관을 방문할 때면 이들 기관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 마저 느끼는 게 사실이다.
"많이 놀래죠. 다른 곳보다 (관공서 등은) 장애인들에게 훨씬 더 냉담하거든요. 방문을 하게 되면 마치 잡상인처럼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순수하게 인식 개선 작업을 위한 일이라고 숱하게 설명을 해도 도무지 믿어주질 않으니까요."
마지 못해 장애인 인식 개선 세미나를 받아들이는 곳도 어쩔 수 없이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 수동적으로 협조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보람을 찾을 때도 있다. 인식 개선 세미나를 마치고 난 다음, 장애인들에 대한 청강생들의 태도는 180도로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임 실장은 강의가 끝난 후 세미나 청강생들로부터 "그간 용기가 없어 시각 장애인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했는데 앞으로는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 것 같다"는 반응을 들었을 땐 어깨 춤이 절로 난다고 했다.
임 실장과 함께 업무를 진행하는 이연주(37) 사원도 "우리가 이제까지 '장애인'이라는 용어에서 '장애'란 두 글자에만 치중하고 '인'(人)이라는 글자에 대해선 소홀이 해왔던 게 사실"이라며 "장애인 인식 개선 활동은 장애인에 대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24년 전 사고로 망막 손실을 당해 시력을 잃은 이 사원도 시각 장애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 개선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다.
임 실장과 이 사원의 요즘 스케줄은 빡빡하다. 각급 학교는 물론 사회단체에서 1주일에 3~4개에 이르는 세미나 일정을 소화해야 되고, '전국민 점자명함갖기운동'도 꾸준하게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국민 점자명함갖기운동은 장애인과 더불어 산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2005년부터 전국민을 대상으로 명함에 이름과 전화번호 등을 점자로 찍어주고 투명 스티커에 이름이나 좋아하는 낱말을 점자로 표시해 휴대廈?붙여주는 활동이다.
해야 할 일에 비해 전문 인력과 예산이 부족해 늘 시간에 쫓겨 살지만 임 실장과 이 사원의 마음은 흐뭇하다. 장애인들에 대해 하루하루 변해가는 사회적인 공감대를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는 결코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일반인도 동정 어린 눈빛으로 장애인을 바라볼 게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아직 그래도 세상은 살만 하잖아요." 임 실장의 부드러운 목소리에선 진지함과 자신감이 묻어났다.
허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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