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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모던보이와 강마에

입력
2008.10.1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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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던보이> 이해명(박해일)은 그야말로 오렌지족이다. 친일파 땅투기꾼 아버지의 돈으로 일본 유학까지 한 그는 명품 구두와 모자와 옷으로 멋을 내고는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매일 고급 술집을 드나들고, 예쁜 여자나 유혹하며 살아간다. 최신 헤어스타일의 그의 머리 속에는 '나만 즐기기'로 가득 차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조국의 현실도, 신음하는 동포도 그와는 아무 상관 없다. 관심도 없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나라야 망했든 이 한 몸 편안하고 즐겁게 살면 되지. 이게 낭만주의 아닌가. 어릴 때부터 일본아이가 되고 싶었고, 남들보다 더 편하게 살고 싶은 게 꿈이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한 가닥 양심은 남아 있는지 조선총독부 1급서기관으로 일하는 것을 놓고는 점쟁이가 자신이 일하는 곳은 10년 안에 홀랑 망한다고 했기 때문에 나름 의미가 있다는 해괴한 해석을 늘어 놓는다.

자기만 알던 이기주의자들

그가 첫눈에 보고 반한 클럽의 댄서이자 가수 조난실(김혜수)에 '올인'을 시도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아뿔싸. 돈과 반지르르한 얼굴, 폼 나는 직장이면 그냥 정복될 줄 알았는데 이 여자 그게 아니다. 이때부터 친일파 뺀질이의 인생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오로지 조난실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현실과 역사 속으로 첨벙 뛰어 든다.

집착은 이기주의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던보이의 한 여자에 대한 집착은 시간이 갈수록 이타주의로 바뀐다. 자신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목숨을 민족을 위해 희생하려는 사람을 '사랑'한 죄다.

이해명은 바뀜을 모른다. 비록 일본장교들 앞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드는 해프닝을 벌여 '반일' 조선인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그는 여전히 고달픈 독립운동가가 아닌 낭만적 '모던보이'로 살아가려 한다. 가치관이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달라졌다면 그도 이제는 조선의 독립을 진심으로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제2의 조난실을 만났을 때 함께 조선말로 노래 부를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낭만'이 가능할 테니까.

또 다른 지독한 이기주의자 MBC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의 강마에(김영민). 정통 엘리트코스를 밟은 최고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그의 단골 반문은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이다.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면 그는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 이유란 곧 '나의 이익'이다. 두루미(이지아)나 자신과 이름이 같은 음악천재 강건우(장근석)에게도 늘 그 이익(이유)를 대보라고 요구한다. 상대의 예상, 상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반응과 행동도 이 때문이다.

강마에의 이기주의는 자기 확신에서 온 탄탄한 울타리이다. 그 울타리만이 자존심을 지키고, 나아가 자신을 보호해 주는 무기라고 생각한다. 어린시절 가난과 절망 속에서 그는 세상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무서움, 나 혼자라는 개인주의를 배웠다. 철저히 혼자 일어선 그에게 인정이니, 연민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은 무능하고 게으르고 의지박약한 인간들의 구실일 뿐이다.

'순수'가 빚어낸 새로운 이웃

그렇게 마음을 열 줄도, 나눌 줄도 모르던 그가 오합지졸이라고 업신여기던 사람들과 함께 울타리를 무너뜨린다. 오케스트라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연주가 어울려 완성되듯 삶도 그런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울타리에서 나와 아기가 걸음마를 하듯 서투르고 어색하게 세상 속으로 걸어간다. 바보, 똥 덩어리는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게 많으며, 동시에 부족한 것이 많은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인정머리 없는 인간이 아니다.

같은 이기주의자이지만 이해명과 강마에는 다르다. 철 없는 귀공자와 편견과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인간, 낭만에 목숨 걸고 낭만과는 담을 쌓은 인간. 그러나 그들에게는 '순수'란 공통분모가 있다. 사람들을 따라 '나'만이 아닌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 같은 마음. 아무리 타고난, 아니면 지독히 꼬인 이기주의자라도 이런 매력은 있어야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웃이 아닐까.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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