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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31> 거품-사랑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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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31> 거품-사랑의 유토피아

입력
2008.10.1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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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입에 올리면서도 그게 뭘 가리키는지 설명해보라면 난감해지는 낱말들이 있다. '거품'도 거기 속할 게다. 어린아이들에게도 친숙할 이 말을 똑떨어지게 정의할 수 있는 어른은 드물 테다.

그가 과학 교사이거나 그 비슷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는 한 말이다. 나는 과학교사가 아니다. 학생 시절 과학 시간이 즐거웠던 기억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이 말의 뜻을 깔끔하게 설명해줄 수 없는 대부분의 어른에 속한다.

결국, 내게 너무 익숙한 이 말의 뜻을 또렷이 알기 위해, 나는 국어사전을 뒤적인다. 자주 베개로 대용하는 바람에 표지와 앞뒤부분이 떨어져나간, 내 낡아빠진 사전의 본문은 '거듭거듭'이라는 표제어로 시작하고 있다.

다행이다. 앞부분이 대여섯 장만 더 떨어져나갔어도, 나는 이 사전에서 '거품'을 찾을 수 없었으리라. 오늘이라도 당장 새 국어사전을 마련해야겠다.

거품은 부정적 뉘앙스 강해

내 사전은 '거품'을 "(1) 액체 속에 공기가 들어가 속이 비어 둥글게 부푼 방울. 예) 비누 거품. (2) 유리 따위 투명체에 공기가 들어가 둥글게 보이는 것. 기포(氣泡)."라고 풀이해 놓고 있었다.

깔끔한 설명이었다. 그게 뭔지 너무 잘 알면서도 막상 그 뜻을 밝히자면 고심했을 이 낱말을 사전 편찬자는 똑떨어지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나와 같은 처지였을 독자들도 이제 '거품'의 정의를 잘 알게 됐으리라.

이쯤에서 멈췄어야 했는데, 혹시라도 더 자세한 정의가 있을까 싶어 <네이버 백과사전> 을 찾아보았다. 과연 이쪽 설명은 더 전문적이고 권위 있어 보였다. 독자들도 아시다시피, <네이버 백과사전> 은 표제어를 '요약'과 '본문'으로 나눠 풀이하고 있다.

이 사전의 표제어 '거품(foam)'에 대한 '요약'은 "액체나 고체에 둘러싸인 기체방울이다. 맥주ㆍ비누ㆍ세제ㆍ포말소화기ㆍ포말유리ㆍAE제ㆍ소프트아이스크림ㆍ부유선광(浮遊選鑛) 등에 널리 이용된다."였고, '본문'의 첫 문장은 "액체 또는 고체의 내부나 표면에서, 그 액체 또는 고체가 기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기포(氣泡)라 하고, 기포가 많이 모여 액체 또는 고체의 박막(薄膜)에 의해 기체가 격리되어 있는 상태를 포말(泡沫)이라 하며, 이러한 기포와 포말을 총칭하여 보통 거품이라 한다."였다.

'요약'과 '본문' 첫 문장만 읽었는데도 정신이 사나워지는 듯해, 본문의 나머지를 읽는 일은 포기했다. 그런데 '요약'에만도 내게 낯선 말이 둘이나 있었다. 'AE제'와 '부유선광'이 그것이었다.

다시 <네이버 백과사전> 을 두드려 'AE제'와 '부유선광'의 뜻을 대강 알게 됐으나, 그 정의를 여기 옮겨놓지는 않겠다. 길기도 길거니와, 그 정의에도 내가(그리고 어쩌면 독자들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 드문드문 끼어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네이버 백과사전> 이 '거품'을 정의하며 동원한 '뜻 모를 말들'과 상관없이, 거품이 뭔지 알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 대롱을 입에 대고 비눗방울을 만들어보았고, 우리들 가운데 운 좋은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목욕통 물에 거품제(劑)를 녹여 거품목욕을 하는 호사를 누린다.

'거품경제'니, '부동산거품'이니, '버블세븐 지역'이니 하는 말도 있다. 이런 말들에서 '거품'이나 거기 해당하는 영어 '버블(bubble)'은 부정적 뉘앙스가 짙다.

그 거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사태나, 속이 텅 빈 채 부피만 사뭇 부풀린 허세의 은유다. bubble의 유의어라고 할 수 있는 foam에는 이런 부정적 뉘앙스가 없는 듯하다. 과도한 금융자율화로 주가와 지가가 폭등하는 바람에 경기 국면이 실물부문의 움직임과 동떨어져 과대팽창하는 상태는 (economic) bubble이라 부르지 foam이라 부르지 않는다.

거품은 어떻게 사랑의 말이 되는가? 나는 세상의 사랑 가운데 적지 않은 경우가 거품의 심리학에서 태어난 것이리라 넘겨짚는다. 이 때, 거품의 심리학은 스탕달이 <연애론> (De l'Amour: 1822)이라는 에세이에서 발설한 '결정작용(結晶作用: cristallisation)'과 비슷한 효과를 낳는다.

스탕달이 (남성) 연애심리의 핵심단계로 파악한 결정작용이란, 잘츠부르크의 암염 채굴장에 던져진 나뭇가지가 이내 소금의 결정으로 덮여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게 반짝이게 되듯, 연애 심리도 이런 과정을 거쳐 공상의 세계에서 상대방을 극도로 미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정과 거품은 사실 정반대의 이미지를 지녔다.

한쪽 이미지가 응축된 단단함이라면, 다른 쪽 이미지는 터질 듯한 부풂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슷하다. 상대의 단점에 눈이 멀게 한다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상대의 단점마저 장점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연애는 착각·환상에서 시작

연애감정에 빠졌을 때, 제 연인의 신경질은 섬세함으로 보이고, 우유부단함은 신중함으로 보이며, 유약함은 너그러움으로 보이고, 폭력봉?강건함으로 보인다. 동그란 눈은 보름달을 닮아 예쁘고, 가는 눈은 초승달을 닮아 예쁘다.

연인의 말주변이 좋을 때 그 달변이 발랄한 지성의 증거로 보이듯, 연인의 말수가 적을 때도 그 어눌함이 웅숭깊은 지성의 상징으로 보인다. 연인의 살짝 얽은 얼굴은 귀여운 보조개들로 채워져 있는 듯하고, 연인의 팔자걸음은 자연과 조화롭다.

연인의 파란 눈은 바다와 하늘을 닮아 사랑스럽고, 연인의 갈색 눈은 알밤(栗)처럼 귀엽고 앙증스럽다. 이런 모든 과정은 결정화의 과정이면서 거품이 부풀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결정작용이나 거품의 심리학에 따르면, 연애란 착각이고 환상이다. 사실 적지 않은 연애들이 이런 착각이나 환상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단계에서, 혹은 거품단계에서 최고조에 이를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런 경우에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말한다. 그 사랑이 결혼으로 열매 맺은 뒤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졌을 때, 다시 말해 거품이 터졌을 때, 우리들은 밋밋한 결혼생활을 맥없이, 권태롭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이어간다.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 가운데 용기 있는 이들은 이혼을 하기도 한다. 적지 않은 사랑이 거품이라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런 거품 없이 이뤄지는 사랑은 매우 드물 것이다. 열정을 낳는 것은 부풀려진 매력인데, 그 부풀려진 매력이 바로 거품이기 때문이다. 슬퍼라, 거품은 사랑의 유토피아(아무 데도 없다는 뜻이다)다.

거품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성자들에게나 가능할 테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성자가 아니다. 우리들의 세속적 사랑 대부분은 거품 속에서, 부풀려진 매력 속에서, 눈에 쓰인 콩깍지에 의지해 이뤄진다.

그러니까 "저 커플은 참 어울리지 않아. 어쩌다가 저런 여자가 저런 남자를 만났다지?" 따위의 말은 입 밖에 내선 안 된다. 거품을 만드는 방식은, 매력을 부풀리는 방식은 제 각각이기 때문이다. 제3자의 눈에는 도무지 띄지 않는 어떤 매력이, 거품처럼 부풀어, 두 남녀를 붙어있게 하는 것이다.

'거품'의 이전 형태는 '더품'이다. 문헌상으로 '더품'이 '거품'보다 앞서있다. 이것만 보면 /t/ > /k/의 음운변동이 조선조 어느 때쯤 일어났다고 넘겨짚기 쉽다. 그러나 일부 국어사학자들은 외려 '거품'이 최고(最古) 어형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거품'이 '더품'보다 더 옛 형태였으리라 추정한다. '거품'이 '더품'으로 변했다가, 다시 '거품'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논거는 신문에 늘어놓기에 너무 전문적이다. 게다가 정설(定說)이라 못박는 것이 그리 안전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러니 이쯤에서 멈추자.

아무튼 서북 방언에는 '더품' 형태가 아직 남아있다고 한다. 서남 방언에는 '거품'의 음운도치형인 '버쿰'과 그 변형들인 '버큼' '버끔' '버꿈' 따위가 남아있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은 '버끔'인 듯하다.

국어사전 편찬자들이 '버끔'을 '거품'의 서남 방언으로 보고 있어서, 이 말은 국어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지 않다. 그것을 두고 시비할 생각은 없으나, 서남 방언에 비교적 익숙한 서울 방언 사용자로서, 나는 '거품'과 '버끔'이 같은 뜻을 지녔다고 생각지 않는다.

즉 두 말의 어감이 내겐, 방언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퍽 다르게 다가온다. '거품'이 소멸의 운명, 무상(無常)의 기호라면, '버끔'은 생장(生長)의 운명, 신생의 기호다. 보글보글, 자글자글 끓어오르며 비등점을 넘기는 버끔! '거품'이 허황함의 언어라면 '버끔'은 야무짐의 언어다.

'거품'이 곧 이울 화사함, 곧 깨질 허영심의 말이라면, '버끔'은 앞길이 창창한 싱그러움의 말이다. '거품'이 인어공주의 슬픈 최후라면, '버끔'은 비너스(아프로디테)의 어기찬 탄생이다. 이 정도로 뉘앙스가 다르다면, '버끔'을 표준어로 인정해 표제어로 올려도 되지 않을까?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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