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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위장된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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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위장된 축복

입력
2008.10.10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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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지금 겪는 외환 위기는 '위장된 축복(disguised blessing)'이다."

미셀 캉드쉬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1998년 서울을 방문해 정ㆍ재계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IMF가 국가부도 위기에 몰렸던 우리나라에 구제금융을 제공한 대가로 공공 금융 기업 노동부문 개혁을 충실히 이행하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IMF의 처방전은 가혹했다. 외화 유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30%대의 살인적인 고금리정책을 강요하고, 재정긴축, 부실금융사 퇴출, 자유변동환율제 채택 및 자본시장 개방확대 등을 강하게 요구했다.

▦돈 자루를 들고 있던 IMF의 극약처방은 고금리에 신음하던 수많은 중소기업을 '바람과 함께 사라지게' 만들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가 깨지며 30대 재벌 중 16개 그룹이 쓰러지고, 부실 금융회사가 대거 퇴출됐다. 중산층이 붕괴되고, 극빈층이 증가하면서 사회 양극화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대두했다. IMF의 개혁프로그램은 기업 연쇄도산과 실업자를 양산, 잘못된 처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회사 건전성 제고, 기업 재무구조 개선, 주주중시 경영 등을 통해 우리 경제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다가가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미국 금융위기가 우리 금융시장을 초토화시키면서 외환위기를 겪은 지 11년 만에 2차 환란을 겪고 있다. 찰스 킨들버거와 로버트 알리버가 <광기 패닉 붕괴> 에서 "금융위기는 끝없이 피어 오르는 질긴 다년생화"라고 강조한 것이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세계 6위 외환보유국인데도 은행들의 달러차입이 막혀 환율이 폭등하고 주가는 폭락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가 3년 만에 외환위기 조기극복을 선언하고, 참여정부도 보유외환이 넉넉하다며 달러 퍼내기로 우쭐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참으로 허망하다. 캉드쉬의 '위장된 축복' 발언은 공허한 말로 끝났다.

▦환란이 재발한 것에 대해 여러 요인이 지적되지만, 금융위기 바이러스를 차단할 방화벽,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쌓지 못한 데서 근본원인을 찾아야 한다. '작고 개방된' 우리경제는 외부충격에 취약하다. 이런 점에서 나라곳간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생명줄을 튼튼히 하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일시적인 경상수지 흑자에 도취해 달러 퍼내기에 나선 것이 아쉽기만 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1차 환란 때처럼 나라 곳간을 3,000억 달러, 더 나아가 5,000억 달러까지 늘리는 데 노사정이 합심해야 한다.

이의춘 논설위원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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