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7년 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면서부터였다. 퇴직 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여러 선배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어떤 선배는 한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서 '일 없이 집에서 노는 사람'이라거나 '젊은 사람이 능력 없어서 논다'고 얘기를 할까 봐서 그랬다는 것이다. 퇴직 후에도 출근하듯 어디론가 갈 곳을 찾아 매일 나간다는 선배도 있었다.
직장을 그만둘 때만 해도 한동안은 아무 일 없이 쉬기만 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오랫동안 굳어진 몸의 습관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퇴직 후에도 일요일 오후가 되자 초조하고 이유 없이 기분이 처지기 시작했고, 회의 때문에 유난히 서두르던 월요일에는 어김없이 일찍 눈이 떠졌다. 늦게 일어날 생각으로 새벽에야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그랬다. 이왕 일찍 일어난 김에, 사무원들의 출근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에서 하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우선 시간을 들여 개가식 서가에 배열된 서명을 죽 읽어나간다. 읽어나가다 보면 반드시 마음에 드는 서명이나 표지, 저자 이름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그 책을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읽는다. 그러는 동안 마음이 움직이면 아예 책상으로 책을 가져온다. 그리고 천천히 읽기 시작한다. 다른 건 없다. 그게 다다.
책을 읽는 것은 연쇄 작용을 일으키기 마련이어서, 내가 읽은 책은 읽고 싶은 또 다른 책을 알려 주고, 다시 그 책을 찾아 읽어나가면 숨어 있던 또 다른 책들을 만나게 된다. 그 과정을 여러 번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어느 단체나 기관의 추천도서가 아닌 자신만의 리스트를 갖게 된다.
누구도 책의 선택을 강요하지 않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리스트를 결재 받아야 할 상사도 없고 거창하게 기획서 형식으로 만들 필요도 없으며 제출 기한 같은 것도 있을 리 없다. 모든 과정은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리스트를 만들어 나가다 보면 세계는 읽고 싶은 책의 목록만큼이나 무한하고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 이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도서관이다.
모두 아는 것처럼 도서관의 풍경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책을 발굴하기 위해 느릿느릿 서가를 왕복하는 걸음걸이, 신청 자료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차임 벨 소리, 책을 꺼낼 때면 피어나는 희미한 먼지, 사서가 굴리는 카트의 바퀴 소리, 모두가 침묵 속에서 책이나 자료를 읽고 있는 가운데 간혹 들려오는 숨죽인 말소리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환상문학의 창시자이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불리는 보르헤스가 '천국이 있다면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한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세계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서가에 꽂힌 책들 사이사이에 숨어서 반복과 갱신과 확장을 되풀이한다. 투쟁과 갈등은 책의 선택을 고민하는 이용자의 마음속에나 있는 일이다.
그 세계에서 나는 어떤 책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만나왔다. 정신없이 달려왔던 나, 조직 속에서의 나, 그러느라 잊고 있었던 나를 더디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책의 발굴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기꺼이 그 발굴을 도와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도서관이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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