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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헌혈과 매혈, 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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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헌혈과 매혈, 그 사이

입력
2008.10.08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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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서야 피땀 흘려 번 돈이 어떤 건지를 안 셈이죠. 제가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은 땀으로 번 돈이고, 오늘 번 돈은 피 흘려 번 돈이잖아요. 피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지요. 반드시 큰일에 써야죠." 중국의 3세대 작가군을 대표하는 위화(余華)의 1996년 작 <허삼관 매혈기> (許三觀 賣血記). 소설의 주인공 허삼관은 피를 판 뒤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도 벌 수 없는'거금 35위안을 손에 쥐고 영양 보충을 하기 위해 돼지간볶음 한 접시와 황주(黃酒)를 들며 돈을 큰일에 쓰겠다고 다짐하지만, 삶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허삼관은 처음 피를 판 돈으로 결혼하고, 아들 셋을 둔다. 큰아들은 아내가 결혼 전에 잉태한 남의 자식이다. 긴 가뭄으로 가족들이 57일 동안 옥수수죽만 먹자 허삼관은 피를 팔러 간다. 그 피 판 돈을 손에 쥔 아내는 희뿌연 담벼락을 보며 탄식한다. "피가 땀처럼 덥다고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식구들이 오십칠 일간 죽만 마셨다고 또 피를 팔았고, 앞으로 팔겠다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디나…이 고생은 언제야 끝나나…."그날 저녁 가족들은 배불리 국수를 먹는다. 하지만 큰아들 몫은 군고구마 한 개뿐이다.

▦매정하던 허삼관은 큰아들의 생부가 죽자 마을 사람들 앞에서 큰아들이 친아들이라고 선언한다. 큰아들은 문화대혁명의 거센 바람 속에 '농촌 생산대'로 떠나지만 간염에 걸려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내와 큰아들을 상하이의 큰 병원으로 보낸 뒤 목숨을 건 '매혈' 여정에 오른다. 상하이까지 가는 동안 들르게 되는 도시에서 큰아들의 병원 치료비를 벌기 위해 피를 팔며 생사의 고비를 넘는다. 이순의 나이가 된 허삼관. 돼지간볶음과 황주 생각이 간절한 나머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피를 팔려 하지만 거절 당하고, 거리에서 눈물을 쏟는다.

▦허삼관처럼 한때 우리 사회에도 매혈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1980년대 들어 경제 사정이 호전되면서 매혈은 자취를 감췄고, 99년에는 법으로 금지됐다. 무엇보다 헌혈 문화 확산이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한 해 250만 명이 넘던 헌혈자는 지난해 200만 명으로 줄어드는 등 계속 감소 추세여서 안정적 혈액 확보가 절실하다. 올해 9월까지의 헌혈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 늘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알고 보면 취업할 때 가산점을 받으려는 대학생들이 늘어난 덕분이라니, 이게 진정한 헌혈일까. 헌혈과 매혈, 그 중간 정도가 아닐까 싶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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