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재수생인 정모(27)씨는 지난 5일 서울의 한 '헌혈의 집'을 찾았다. 서울 중위권 대학 출신으로 졸업반이던 지난해부터 20여군데나 입사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신 정씨는 친구에게서 "헌혈을 하면 기업에서 가산점을 준다"는 말을 듣고 귀가 솔깃했다.
정씨는 "취업에 도움이 될까 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헌혈을 했다"면서 "주변에서 이젠 헌혈증도 하나의 자격증이라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취업 전형에서 헌혈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기업들이 늘면서 헌혈의 집에 청년 구직자들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그 덕에 8월 이후 혈액보유량이 크게 떨어졌던 예년과 달리, 올해 8, 9월의 혈액보유 수준은 최근 5년간 가장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혈액보유량은 6.6일분으로, 지난해 동기 2.5일분에 비해 2배 이상 상승했다. 지난해 9월 0.4일분까지 떨어져 비상이 걸렸던 농축적혈구 A형 예비량도 적정량인 7일분에 근접한 6.6일분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혈액 수급의 안정세는 헌혈자 수가 급증한 데 따른 것이다. 올 들어 9월 말까지 누적 헌혈자 수는 173만1,361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55만6,428명에 비해 무려 11%가 늘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대학생 헌혈자수가 지난해 42만8,995명에서 무려 7만명 가까이 늘어난 49만1,961명에 달했다는 점이다. 군인과 회사원, 공무원 헌혈자도 늘었지만 증가 폭에서는 대학생이 압도적이어서 전체 증가분의 약 35%를 차지했다.
대학생 등 청년 헌혈자가 증가한 것은 최근 취업 전형에서 헌혈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기업이 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장기 경기침체와 미국발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어느 때보다 극심한 취업난이 매년 되풀이되는 혈액 수급난 해소에 보탬이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동부화재, KTF, CJ, 한국조폐공사, 한국관광공사, 국민연금관리공단 등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 헌혈자를 우대하고 있다. 헌혈을 사회봉사활동에 포함시켜 헌혈 증서를 내면 1장 당 봉사활동 2시간을 인정, 서류전형에서 최고 5%의 가산점을 주는 식이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고객들과 접촉이 많은 분야일수록 사회봉사활동 반영도가 높다"며 "예전보다 입사지원 서류에 헌혈 기록을 첨부하는 구직자들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학원생 유모(28)씨는 "취업 전선을 뚫는 데 토익과 학점 뿐만 아니라 사회봉사활동도 중요해졌다"면서 "그러나 대다수 구직자들은 봉사활동을 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헌혈을 통해 봉사활동 점수를 따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헌혈의 집 관계자도 "과거에도 대학생의 헌혈 기여도가 높긴 했지만 올해는 더 눈에 띄게 대학생들이 찾아오고 있다"며 "취업에 필요한 봉사활동 점수도 얻고 무료로 건강검진을 받으려는 대학생들이 많아 지면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청년층의 헌혈 증가는 긍정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헌혈 증서가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의 하나로 비쳐지는 현실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구로디지털단지 헌혈의 집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준혁(23)씨는 "가끔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실제 헌혈증이 취업에 도움이 되는지 문의를 해온다"면서 "헌혈이 취업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모습에 씁쓸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성환 기자 bluebir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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