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각에서 투자은행(IB)에 대한 무용론이 고개를 들고 있으나, 여전히 IB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높다. 전문가들은 "지금 단계에서는 IB의 존폐에 대한 논의보다는 과연 어떤 구성과 내용을 가진 IB냐가 중요하다"고 보고있다. 그런 가운데 미국식 IB보다는 상업은행을 중심으로 한 유럽식 CIB(Commercial bank+IB)가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독일의 도이치은행이 그중 하나다.
도이치은행은 IB사업을 강화한지 12년 만에 사업실적 세계 6위(2006년 기준)로 단숨에 치고 올라갔다. 유럽시장의 성장 정체에 따른 수익기반 악화로 1995년부터 IB 전환을 꾀한 도이치은행은 10여년 만에 은행 수익 26조원의 70%가량인 17조원을 IB부문에서 거둬들이는 세계 6위의 글로벌 IB로 성장했다.
이 은행의 성공은 IB 전환을 준비중인 국내 금융기관들에게는 벤치마킹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증권연구원과 서울 IB포럼이 주최한 국제콘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한 콜린 그라시(사진) 도이치은행 아ㆍ태지역 최고경영자(CEO)를 6일 만나 도이치은행의 성공배경과 현재 금융위기 상황에 대한 진단을 들어봤다.
그라시 회장은"미국계 IB들이 몰락하게 된 원인은 자체적인 리스크 관리와 자금운용의 규율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라며 "이를 계기로 세계는 IB에 대한 무용론 보다는 리스크 관리와 기업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점에서 도이치은행의 성장은 철저한 리스크 관리와 엄격한 규율을 실천하는 기업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의 은행과 증권사들이 해외 진출의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어떠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지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라시 회장은 도이치 은행의 성장사를 간략히 소개했다. 도이치은행은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12년 동안 상업 및 소매금융 비중은 62%에서 20%로 축소한 반면 IB 부문의 비중은 21%에서 56%로 두 배 이상 키웠다. 전체 수익의 69%를 독일 내에서 얻던 수익구조 또한 이 기간 급격히 다변화됐다. 지난해 기준으로 도이치은행의 독일 시장 의존도는 29%로 나머지 70% 이상을 전세계에서 거둬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동네 은행에 불과했던 도이치은행이 글로벌 CIB로 도약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은 우선 기업 인수합병(M&A)이었다"며 "89년 JP모간의 옛 런던 지사였던 모간그랜펠을 인수, IB부문에 뛰어들었고, 98년에는 미국계 IB인 뱅커스트러스트(BT)를 인수해 월스트리트에 진출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해외시장 진출의 필요성과 관련, "세계화를 맞아 전세계 은행과 경쟁하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무역금융과 외환거래, 소매금융 등 전통적인 은행업무는 도이치은행에서 맡으면서도 투자은행 업무는 외국계 유명 IB에 맡기는 구조에서 도이치은행은 IB부문에 진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물론 M&A를 통한 성장 전략은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라시 회장은 "M&A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며 "M&A를 하면 회사 규모는 커지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복잡성을 파악하지 못하고는 성공할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도이치은행이 해외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회의가 있던 것도 사실"이라며 "그러나 해외진출 및 가치창출의 필요성에 입각해 회사 임원진이 방향을 확고히 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금융기관간 M&A는 명확한 방향을 잡고 소규모로 빠르게 진행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라시 회장은 글로벌 IB를 육성하려는 한국 금융기관들의 노력에 대해 "국제 금융시장이 위기를 맞고 있는 암울한 상황이지만 글로벌 IB들이 몰락한 덕택에 해외시장의 경쟁무대가 비교적 공평해진 점은 긍정적"이라며 "목표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해외로 진출했다 실패한 일본의 경험을 새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현재 금융위기와 관련 "위기 상황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으며 실물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며 "특히 금융기관간 '신용(Trust)'이 깨진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향후 부동산 가격은 계속 떨어질 것이며 각국이 실시하고 있는 구제금융의 내용과 이유에 대해서도 투자자들이 큰 지지를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많은 피해자들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며 자유무역 시장의 원칙에 대한 비판이 나올 수 있고, 금융시장에서 정부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도 지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학만 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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