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엄한 먹빛의 동양학에 도발적인 색채를 입혀온 한형조(49)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이번에는 조선 유학을 건드린다. <왜 조선 유학인가> <조선 유학의 거장들> (문학동네 발행) 두 권의 책을 한꺼번에 냈다. 조선> 왜>
그의 전행을 떠올려 보자. 금강경을 푸는 데 들뢰즈의 틀을 들이대고, "강단의 철학보다 길거리의 사주관상이 더 철학적이다"라고 했던 그다.
이번 책들도 깊이 잠기는 무게보다는 파헤치려는 기운이 승하다. 그러나 본디 주자에 뿌리를 둔 저자이니만큼, 성리학을 다룬 부분은 철학적 논변의 관점에서 봐도 비교적 실하다.
<왜 조선 유학인가> 는 제목에 책의 의도와 방향이 모두 담겼다. 서문에 이렇게 썼다. "식민의 상처는 아물었고, 근대의 욕망은 성취되었다. 왜>
그런 후 우리는 어떤 간절함으로, 무슨 꿈을 담아, 조선 유학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그는 계통을 갖춘 일관된 서술 대신 조선 유학에 관한 자신의 이런저런 작업을 짜맞춰 그 물음에 자답한다.
일곱 개의 감각적 소제목(자책, 곤혹, 시선, 방법, 대화, 스펙트럼, 지도)이 붙은 사유의 조각들은 각도를 바꿔가면서 '왜'에 도전한다. 먼저 자책. 조선은 왜 망했는가. "시대의 요청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는 맥빠진 언설이 이 책에서도 되풀이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진부한 테제에서 "위에서부터의 권위와 아래로부터의 저항의 대립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로 나아간다.
그리고 '조선의 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권위와 저항의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혁신의 실패'에서 다시 보수적 명제를 도출해 내는, 논쟁의 소지를 안고 있는 변증법이다.
'방법'에서는 세계화가 진행 중인 21세기에 어떻게 유학에 접근할 것인가를 살펴본다. 근대로 오면서 생긴 언어의 장벽 앞에서 유교 전통이 대응해 온 네 방식-무시, 야유, 변명, 칩거-을 차근히 짚으며 동양학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흥미로운 꼭지는 퇴계와 혜강의 삶을 병치시키는 스펙트럼. 세상의 부름을 물리치고 은거했던 퇴계 이황과 학문이란 현실 해결의 매뉴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과격한 실용주의자 혜강 최한기의 이야기가 두 겹으로 흐른다.
<조선 유학의 거장들> 은 조선 최고 지식인들의 사유를 진경산수로 펼쳐 보여준다. 하지만 기존의 유학사와는 거리가 멀다. 거유(巨儒)들을 연대순으로 망라하지도 않고, 그들의 학맥과 계보도 간단히 무시한다. 조선>
거두절미, "조선 유학의 최고수들의 문을 두드려, 그들의 핵심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저자는 그 경계를 산꼭대기에서 봉우리들을 바라보는 것에 비유한다.
"정상들과 정상들은 지호지간, 아주 가까이 있다… 율곡의 주자학은 불교와의 대면이고, 다산의 학문은 주자학과 서학 사이에 난 길이며, 혜강의 기학은 근대의 사유를 포섭하고 있다."
웅장한 조선 유학의 산맥을 통해 저자가 보려는 것은, 또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지론은 "전통이 지금의 삶을 풍부하고 윤택게 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유학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권력이 현대인들을 소외시키는 지금 시대의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주자와 퇴계, 정약용, 마테오 리치, 라이프니츠가 그 '길'을 위해 호출된다. 그래서 한형조의 유학은 "아직 오지 않은 유학"이다. 기도문처럼, 혹은 출사표처럼 그는 이렇게 썼다. "편만한 소외와 망각의 시대, 조선 유학의 도저한 조언과 지혜를 구한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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