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이 임박했던 1997년 10월말.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외환보유액은 305억 달러였다. 1996년 말과 비교해서도 감소폭이 30억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물론 충분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근근히 버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외환보유액을 써야 할 위기상황이 닥치자, 얘기는 달라졌다. 장부상 보유액은 305억달러였지만,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가용 외환보유액'은 이에 훨씬 못 미쳤다. "11월19일 경제부총리에 취임한 뒤 상황을 보니 정부의 가용 외환보유액은 140억달러에 불과한 반면 단기외채는 무려 1,000억달러에 달했다"는 게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의 회상. IMF 구제금융 합의 시점인 그 해 12월4일에 가용 외환보유액은 고작 50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처럼 실제 외환보유액과 가용 외환보유액이 큰 차이를 보였던 건, 한국은행이 국내은행 해외점포 등에 예탁해 둔 돈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 3저(低)호황을 타고 막대한 달러가 국내에 밀려들어오자, 한은은 이 돈을 시중은행에 맡겨 굴리도록 했다. 그러나 막상 금고가 바닥나 한은이 이 돈을 회수하려 했을 때, 은행들은 돌려줄 달러가 없었다. 한은 대차대조표상에는 외환보유액으로 잡혀 있었지만, 위기 상황에선 전혀 활용할 수 없는 '불가용(不可用) 외환'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외환보유액이 충분하다"고 계속 되뇌는 지금 정부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식 외환보유액 2,400억 달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위기 시 즉각 동원할 수 있는 금액이 얼마인지가 중요하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물론 환란 당시와 지금의 상황을 대등하게 놓고 비교할 순 없다지만, 절대적인 외환보유액 수준은 최악의 위기 상황에선 단지 수치에 불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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