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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외국어 학습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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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외국어 학습에 거는 기대

입력
2008.10.0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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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영어가 우리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전체 배움 경험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는지요. 이를 정확하게 측정할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자란 세월을 돌아보거나 지금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를 들여다보면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영어 배우느라' 보냈거나 보낸 세월로 소모된 삶의 양은 분명히 영어 이외의 것을 배우느라 보낸 세월들 모두 합한 것에 못지않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영어를 잘 해서'와 '영어를 못해서' 때문에 아예 운명이 달라진 경우까지 들면 영어 배움의 비중은 소모된 세월의 양을 수치화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절대적인 무게'를 갖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우리에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일찍이 한문을 공부한 경험도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때는 한문을 익히는 일이 계층적 한계를 가진 것이었는 데 비해 오늘날의 영어의 경우에는 그것이 상당히 허물어져 '학교'에 들어가지 않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누구나의 일이 되었다는 사실만 다르지 한문학습의 비중은 오늘보다 더 엄청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른바 '잘 삶'을 위한 규범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무튼 내 나라 말이 아닌 낯선 말을 배우려고 이렇게 아예 삶을, 그것도 '젊음'을, 온통 기울인다는 것은 '끔찍하기도 하고 대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두고 흔히 접하는 '민족주의적인 울분'을 토한다거나 이와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익숙한 이른바 '선진적인 사명감'을 새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늘 스스로 흥미로운 것은 자기 언어와 자기 문자를 가진 한 공동체가 자기네 삶을 기울여 다른 낯선 문자와 언어를 배운다고 하는 사실이 초래할 '문화적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정치적 의미라든지 경제적 의미는 비교적 명확한데, 굳이 이름 붙여 문화적 의미라고 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것이라고 서술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언어란 단어의 음가(音價)도 다르고 그 단어의 개념도 직역이 불가능할 만큼 다릅니다. 그 말을 있게 한 길고 오랜 경험의 축적이 그 단어에 함축된 의미나 느낌을 미묘하게 다르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문(構文)도 다릅니다. 특히 우리말과 영어, 그리고 한문의 경우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문법이 다릅니다.

이러한 '경험'이 불안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외국어 학습 때문에 자기를 상실할 수 있다는 염려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순수가 훼손되고, 맑음이 오염된다는 걱정도 깊습니다. 사유방식을 다르게 하기 때문에 익숙한 사물인식의 틀을 뒤집어 아예 전통적인 의미체계마저 혼란스럽게 한다는 지적도 그저 넘길 일은 아닙니다. 하나의 용어가 중첩된 개념들을 담으면서 그 용어가 불투명해저 소통이 모호해진다는 걱정도 예사로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언어의 학습에서는 그러한 염려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저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말을 배운다는 것은 그저 소통을 위한 도구를 확보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른 언어를 학습하면 타인의 경험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 사물을 묘사하는 내 감각이나 언어가 풍부해집니다. 사물을 맞고 그것에 다가가는 나의 태도도 다양해집니다. 타자 앞에 서는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앎도 생깁니다.

자연히 내 삶의 지평이 확장되고, 그만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립니다. 사유방식도 훨씬 유연하고 넉넉해집니다. 하나의 언어만을 익힌 때와는 달리 다양한 사유, 다양한 의미를 확보하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외국어 학습을 통해 그 '이전보다 성숙한 자아'를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외국어를 우리처럼 열심히 하는 나라의 언어문화는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두드러지게 '좋아야' 옳습니다. 말하기도, 쓰기도, 듣기도 하나의 언어만을 익히고 사는 나라의 사람들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물론 오늘 이 땅덩이 위에서 자기네 언어 하나만을 고집할 수 있는 나라는 현실적으로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외국어 학습의 그 눈물겨운 노력을 감안할 때 우리는 서로 자기주장을 편다거나, 사물을 그리거나 자기를 알리는 글을 쓴다거나, 남이 이야기를 할 때 듣는 그 태도 등에서 상대적으로 더 투명하고 논리적이며, 더 다감하고 깊으며, 더 진지하고 정중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언어문화가 그렇게 자리잡고 있다는 어떤 낌새가 뚜렷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낯선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내 언어가 풍요로워지고 내 사유가 경직을 풀고 더 부드러울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주는 것이라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그르지 않지만 현실에는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언어문화는 뜻밖에 가난하고, 또 말쑥하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언어들은, '다른 언어 배우기'에 주눅이 든 탓인지, 치밀하기보다 단순하기를 바라고, 복합문장을 통한 '공간 짓기'보다 단순문장의 중첩을 통한 '지평 연장'을 꾀하려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일상용어들은 풍부하다기보다 너저분하게 되고 있고, 주장의 발언들을 듣고 있노라면 사유의 유연성이라기보다 의식의 균열현상이 논리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듯한 당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술이 제대로 우리 언어문화를 진단한 것인지 아닌지 자신이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사태에 대한 이러한 묘사가 옳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른바 외국어 학습 때문인지 아닌지는 그것이 전혀 실증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다만 '불순한 짐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왠지 그렇다고 말해야 이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 것 같은 못난 희구를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참 답답합니다. 특별히 온갖 매체가 쏟아놓는 글들, 학계의 주장들, 종교의 자기주장의 발언들, 정치의 장에서 소용돌이 하는 언어들을 보고 들을 때면 그러한 변명이라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면 질식할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보람을 느끼는 토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서로 다른 것을 지향하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사유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언어문화를 어디서도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자기 나라 말뿐만 아니라 남의 말조차 생애를 기울여 배우는 우리 언어문화가 언제 그로 인한 풍요로움을 꽃피울 수 있을는지요. 다른 언어 배움의 문화적 의미가 과연 무언지 거듭 거듭 궁금합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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