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는 없다. 인류 멸망의 묵시록적인 분위기가 아주 그럴듯하고, 미래 세계에 대한 묘사나 특수효과에 의존하지 않은 빈 디젤과 양자경의 액션은 현란하며, 촬영 또한 훌륭하다. 그렇게 해놓고 이런 가위질이라니. 액션 스릴러 '바빌론 A.D.'는 아쉬운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지구가 전쟁으로 온통 폐허가 되다시피 한 머지않은 미래.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이들이 위성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얼음을 깨고 나타난 잠수함에 타려고 아비규환을 빚는 장면이나, 여권을 목에 주사한다는 상상력 등 SF적인 재미는 쏠쏠하다.
그러나 전쟁으로 뼈가 굵은 용병 투롭(빈 디젤)이 몽골의 깊은 수녀원에서 뉴욕까지 데리고 가는 오로라(멜라니 티에리)가 컴퓨터와 인간 DNA를 조합해 '만들어진' 하이브리드 신인류이고, 종교집단 노라이트가 오로라가 처녀잉태한 쌍둥이를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음모가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황당하게 끝나버리고 만다.
그때까지 전개된 이야기를 전혀 마무리하지 않은 채여서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두 가지 버전으로 편집된 이 영화의 미국 버전을 봐야 한다는 사실은 처참하다.
'바빌론 A.D.'는 할리우드 자본이 투입된 프랑스 영화다. 원작은 모리스 G 단테의 과학소설 '바빌론 베이비즈'. '증오' '크림슨 리버' 등의 영화로 프랑스 대표 감독으로 떠오른 마티유 카소비츠가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배우도 남자 주연 빈 디젤을 제외하면, 캐릭터나 이미지가 '제5원소'의 밀라 요요비치를 꼭 닮은 멜라니 티에리, 조연으로 나오는 제라르 드파르디유, 랑베르 윌송 등 온통 프랑스 배우들이다.
그런데 배급을 맡은 20세기 폭스사는 러닝타임 93분, 13세 이상 관람등급을 맞추기 위해 프랑스 버전을 상당 부분 잘라내고 액션 장면으로 대체했다. 결말도 상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러닝타임은 11분이 줄었지만 내용상 "투롭이 오로라를 데리고 간다는 뼈대만 같고 전혀 다른 영화"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가 됐다.
프랑스판도 현지 평론가들로부터 크게 호평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판만큼 혹평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7,000만 달러가 든 이 대형 액션물은 미국에서 2,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데 그쳐 흥행 참패를 기록했다.
분위기만 진진하면 줄거리는 관계없다는 관객, 액션에 목마른 관객, 원작 소설(또는 프랑스 버전)에 도전하기 위한 맛보기로 삼겠다는 관객에게 추천한다. 10월 2일 개봉, 12세 이상.
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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