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국신문 더 타임스에서 록 뮤지션 앨리스 톰슨이 쓴 경제 칼럼을 읽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 문학박사 출신의 저명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글 제목은 "버리지 말아요, 은행가는 악당이 아니라 영웅(Hang on, bankers are heroes, not villains)"이다.
'Hang on'은 헤지스(Hazzys) 옷 광고로 알려진 스웨덴 록 그룹의 노래 제목을 빌린 듯하다. 노랫말을 찾아보니 "그대 인생의 기쁨과 고통, 버리지 말아요"라는 구절이 되풀이 나온다.
칼럼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런던의 시티(the City), 금융가를 주름잡던 펀드매니저 등 '금융 귀재'들이 금융위기 속에 대거 실직하고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으나, 경제의 장기 호황을 이끈 공로를 잊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금융경제의 공과(功過)와 운명에 관한 논쟁에 소설가, 록 뮤지션까지 나선 게 흥미롭다.
허황된 '신화와 우상' 쌓기
그러나 유난히 눈길을 끈 대목이 따로 있다. 금융 귀재들은 자신들의 칼날 위에 스스로 떨어졌으나, 그들이 베푼 윔블던 테니스대회와 월드컵결승전 공짜티켓 등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논평가들이 목청껏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지적이다. 설명이 자세하지 않으나, 일찍이 금융경제와 결탁한 언론이 자본주의를 타락시킨다고 개탄한 학자들이 기억 났다.
프랑스의 저명한 알랭 코타를 비롯한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미 1990년 대 초, 투기적 단기수익에 매달리는 금융자본주의를 언론과 미디어가 헐리우드 팬터지 영화처럼 부각시켜 허황된 신화와 우상을 만든다고 비판했다. 막대한 재정적자와 부채, 제조업 붕괴, 불평등과 양극화 등을 외면한 채 이상적 자본주의 모델인양 선전, 금융경제 모델이 심리적ㆍ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는데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통적 기업활동과 은행의 건실한 감독, 사회적 균형과 안정을 중시하는 서유럽 모델에 효율성이 뒤지는 영미 모델을 흔히 맹목적으로 선호한다는 지적이다.
이런 '미디어 자본주의'의 단적인 현상은 정크 본드의 창시자 마이클 밀켄 등 범죄적 투기꾼을 '금융 천재'와 '황제' 따위로 추켜세운 것이다. 밀켄은 뒷날 10년 징역형을 받았으나, 투기적 거래와 인수합병 등에 몰두한 금융경제 주역들의 성공 스토리, '영웅 신화' 선전에 앞장서는 언론 관행은 갈수록 굳어졌다. 금융경제의 폐허에서 그 부도덕성이 두드러지는 금융 CEO와 투기꾼들의 천문학적 연봉과 스톡옵션 관행을 경쟁과 효율이 지배하는 금융자본주의의 '꽃'으로 부각시킨 것도 언론이다.
금융경제 주역을 대중스타로 떠받든 언론의 행태는 '카지노 자본주의'의 부수 현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금융경제의 매력과 영향력을 창출했다. 경제위기의 주범들을 끊임없이 힘과 제국을 확대하는 영웅적 전사(戰士)로 묘사, 그들의 바닥 모를 추락과 수많은 대중의 고통을 초래한 신기루 같은 드라마를 썼다는 비판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앨리슨 톰슨의 변호는 바탕부터 허물어진 우상을 부여안고 새로운 팬터지를 대중의 인식에 심으려는 헛된 시도일 뿐이다.
정치의 극적 변화까지 예상
어설픈 지식으로 경제 이야기를 하는 무모함을 거듭 무릅쓴 것은 우리 사회의 위기 논란이 금융경제 본바닥의 인식에 미치지 못하는 듯해서다. 더 타임스의 대표 논객 윌리엄 리스모그는 7월 중순, 여든 살 생일에 쓴 칼럼에서 1930년대 대공황 경험을 토대로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후퇴와 증시 불황 등이 2007년 수준을 회복하려면 2032년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고 내다봤다. 이어 경제가 균형을 되찾을 때까지 기업과 금융뿐 아니라 정치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우리 전문가들이 이를테면 투자은행의 효용에 집착하는 것은 뭐라 평가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추락하는 달러를 표준화폐로 채택하자는 소설가의 주장이 언론에 버젓이 등장하는 현실은 톰슨의 글처럼 흥미롭기는커녕 자꾸만 걱정스럽다.
강병태 수석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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