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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군 60년 '빛과 그림자'/ 5만명 조선경비대로 창군…이젠 세계평화 역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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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군 60년 '빛과 그림자'/ 5만명 조선경비대로 창군…이젠 세계평화 역군으로

입력
2008.09.30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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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 - 한국전·베트남전… 초기부터 숱한 시련

"적어도 대한민국 정부의 상징인 중앙청만은 외국 군대가 탈환하도록 놔둘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군이 60년 생을 되돌아보는 자서전을 쓴다면 아마도 맨 앞 장은 한국 전쟁에 할애될 것이다. 갓 태어난 군에 닥쳤던 참혹한 고난의 시절, 박정모(82) 예비역 해병대 대령은 그 한복판에 있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내줘야 했던 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9ㆍ28 서울 수복'을 맞는다. 하지만 정부의 상징인 중앙청에 태극기가 나부낀 것은 이보다 하루 앞선 27일이었다.

당시 미 해병대와 함께 서울 탈환 선봉에 섰던 박정모 소위 등 당시 한국의 젊은 해병대원들은 26일 시청을 접수했고, 미 해병대의 공격진로였던 중앙청을 탐냈다.

상부의 허락을 얻어 대형 태극기와 장대를 들고 중앙청 태극기 게양 작전에 돌입한 것이 27일 새벽 3시께. 박 소위는 교전 끝에 중앙청에 진입,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이등병조와 함께 깨진 돔 지붕 바깥으로 태극기를 내걸었다. 막 동이 틀 무렵이었다.

박씨는 28일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58주년 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직접 중앙청 태극기 게양을 재연할 생각이었지만 갑작스런 사고로 거동이 어려워 가지 못했다. 병실에서 만난 그는 "꼭 참석해서 자랑스러운 후배들과 함께 태극기를 보고 싶었는데…"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조인까지 3년 1개월이 걸린 전쟁은 수많은 희생으로 점철된 비극의 역사였다. 국군은 전사 13만7,899명, 부상 45만742명, 실종ㆍ포로 3만2,838명 등 62만여명이, 유엔군은 전사 4만670명 등 15만여명이 피해를 입었다. 남한 민간인 37만여명이 사망ㆍ학살되는 등 남한 99만여명, 북한 150만명이 전쟁의 상흔을 피하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 역시 만만치 않은 시련을 안겨줬다. 한국군은 64년 9월부터 8년 6개월 동안 32만5,517명을 파병했다. 5,099명이 전사하고 1만962명이 부상했다. 고엽제로 인한 피해도 커 8월 말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고엽제후유증 환자는 2만7,305명, 후유의증과 2세(70명)까지 포함하면 11만71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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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선 - 軍 사조직 하나회 10여년간 '군림'

대한민국 헌법 제5조2항.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군이 지난 60년간 국토방위를 위해 헌신해 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정치’에 관해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국어대사전에도 올라 있는 ‘정치군인’은 ‘본연의 일보다 정치적인 활동에 치중하는 군인’을 뜻한다. 그리고 군의 ‘정치적인 활동’은 군사 쿠데타로 절정에 이른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주도로 육사 8기생 출신의 일부 군인들이 움직였다. 장교 250여명, 사병 3,500여명 가량의 쿠데타 병력은 한강을 건너 수도 서울의 주요기관들을 접수하면서 장면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방송국을 점령한 이들은 ‘군사혁명’이 성공했다고 발표하고, ‘군사혁명위원회’가 3권을 통합ㆍ장악한다고 선언했다.

79년 10ㆍ26사태로 어두운 터널을 어렵사리 빠져나오나 싶었지만 군은 다시 한번 정치에 손을 댄다.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그 해 12월 12일 저녁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 총격전 끝에 정 총장을 강제 연행했다.

하나회는 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된 사조직이었다. 이들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을 탄생시켰고, 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10여년을 군림했다.

하나회와 12ㆍ12 군사 쿠데타는 김영삼 정부에서 단죄됐다. 93년 3월 8일 김영삼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 하나회 척결에 나섰다. 취임 석 달 만에 무려 42개의 별이 떨어졌다.

95년에는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했고, 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전두환),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노태우)을 확정했다. 두 사람은 김영삼 정부가 끝나기 직전인 그 해 12월 22일 사면,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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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욕 - 율곡 사업… 별들 수십억 뇌물 잔치

1993년 4월 27일, 감사원은 이른바 '율곡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특별감사 착수를 발표했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30여년의 군사정권 시절 성역으로 여겨졌던 군에 찬바람이 몰아치는 상황이었다.

율곡사업은 74년부터 시작된 군무기ㆍ장비현대화사업을 통칭하는 암호명이었다. 모두 32조원을 쏟아 부어 미사일, 장갑차, 함정, 전투기 등을 개발하거나 도입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참담했다. 7월 9일 감사원은 감사 결과를 발표, 모두 118건의 잘못을 적발했다. 두 명의 전 국방장관(이종구, 이상훈) 등 전직 군 고위관계자 6명을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현역 장성 8명을 포함한 53명에 대해 징계 또는 인사조치를 요구했다. 검찰에 고발된 6명이 무기중개상 및 방산업체로부터 받은 뇌물은 모두 16억원에 달했다.

이어진 수사를 통해 수십 명의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군은 치욕에 몸을 떨어야 했다. '10만 양병론'을 주창한 자주국방의 선각자 율곡 이이 선생의 호를 더럽힌 사건이었다.

획득사업을 둘러싼 군의 오욕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문민정부에서도 96년 '백두사업'(군 정찰기 도입 사업) 추진 과정에서 이양호 전 국방장관 등 정부 고위층이 연루된 이른바 '린다 김 사건'이 터지는 등 크고 작은 비리가 계속됐다.

의문사 역시 부끄러운 과거다. 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운동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징집과 녹화사업 과정에서 6명이 의문사 한 것이 대표적이다.

군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많은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2006년 1월 1일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억울한 영혼은 예상보다 많았다. 250~300건 정도로 예상했던 진정 건수는 실제로는 두 배인 600건에 달했다.

9월 말 현재 위원회가 종결한 사건은 295건. 하지만 특별법에 규정된 위원회의 활동 기간은 올해 말까지다. 의문사위 관계자는 "국회 차원의 노력이 없다면 절반에 가까운 의문사 사건은 이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게 된다"고 말했다. 건군 60주년을 맞은 군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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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약 - 78년 '백곰' 미사일 개발 "자주국방"

"소총도 못 만들고 있는데, 유도탄을 개발하라니요. 처음엔 못하겠다고 버텼습니다."

구상회(73) 박사는 1971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극비 지시를 받던 순간을 떠올리며 "죽을 맛이었다"고 말했다. 유도탄은 현대 정밀무기체계의 꽃이다. 미국의 지원 하에 이제서야 소총(M-16) 공장이 지어지고 있던 가내수공업 수준에서 유도탄 개발은 언감생심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 멤버로 로켓개발실장이던 구 박사는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유도무기인 '백곰' 미사일 개발을 이끌었다.

극비 보안을 위한 사업명칭은 '항공공업 육성계획'. 해외에서 연구하던 과학자들을 대거 불러들이는 등 총동원령 체제로 꾸려진 '항공공업 사업단'은 78년 9월 26일 결국 일을 냈다.

박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시험 발사에 성공한 이날 구 박사는 "연구원들이 모두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외형은 미국의 나이키 허큘리스(NH) 유도탄을 모방했지만 유도용 소프트웨어, 유도조종장치 등은 개량하거나 새로 개발해 90% 이상 국산품으로 구성된 국산 유도탄이었다.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 등에 이어 7번째로 지대지 유도탄 개발에 성공했던 겁니다. 국내외에서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렇게 첫 물꼬를 튼 자주국방, 무기개발의 역사는 현재 우리 군을 최첨단 무기체계를 갖춘 정예 군대로 올려놓았다. 작년 1월 꿈의 구축함으로 불리는 이지스함(세종대왕함ㆍ7,600톤급)을 진수, 세계 5번째 이지스함 보유국이 됐다.

아시아 최대의 수송ㆍ상륙함인 독도함(1만8,800톤), 세계 최상급인 차기 전차(K-2), 적진 상공에서 탄을 터뜨려 숨은 적을 제압하는 차기 복합형 소총(K-11) 등 많은 '명품 무기'들이 탄생했다.

90년대 들어 본격화한 유엔평화유지활동(PKO) 역시 우리 군의 성장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PKO를 통해 소말리아, 앙골라, 동티모르, 인도ㆍ파키스탄, 레바논, 그루지아 등 10여개국에 파병했다.

대테러전쟁 지원을 위해 이라크, 쿠웨이트, 아프가니스탄에 군을 보내기도 했다. 소총 한 정조차 외국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6ㆍ25전쟁 당시 16개국의 파병에 감사해야 했던 우리 군은 60년 만에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강군으로 우뚝 섰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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