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진그룹은 지난해 3월 서울증권(현 유진투자증권ㆍ인수대금 1,800억원)에 이어, 로젠택배(작년 5월)와 하이마트(올 1월)을 잇따라 집어삼키면서 국내 인수ㆍ합병(M&A) 시장의 거물로 떠올랐다. 그런데 요즘 유진투자증권 매각을 위해 주간사 선정작업을 벌이고 있다.
#2. 동아건설 등 부실기업을 인수하며 빠르게 성장한 프라임그룹은 요즘 자산 매각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명동 아바타 건물(매각대금 1,700억원) 매각에 이어 올해 4월엔 신도림 테크노마트 사무동(3,000억원)을 팔아치웠다. 신규 프로젝트에 사업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서다.
미국발 금융쇼크로 국내 실물경기 침체가 가속화하면서 기업들의 성장 패러다임도 바뀌고 있다. 그간 알짜기업 인수나 사업 확대를 통한 덩치 키우기에 몰두했다면, 지금은 계열사 및 자산 매각을 통한 슬림화 작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상대적으로 사업 확장 과정에서 차입 의존도가 많았던 기업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지난 7월 금호생명 지분 및 대우건설 자산 매각 등을 통해 4조5,000억원 규모의 유동성 확보 방안을 발표한 금호그룹은 최근 경제 상황 악화를 반영해 추가 작업에 나섰다. 금호산업과 아시아나항공 등 계열사가 보유한 금호생명 지분 전량(68%)을 연말 상장 이전에 매각한다는 복안이다.
박삼구 회장이 4월 기자간담회에서 "금융 부문을 성장동력의 한 부분으로 키우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지 불과 다섯 달 만이다. 그만큼 경영 환경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미국발 금융쇼크 이후 자금줄이 말라가고 있는데다 경기 심리도 워낙 좋지 않아 유동성 확보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된 상황"이라고 전했다.
M&A 신화를 이끌었던 두산그룹은 당장 자산 매각 등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일단 '동작 그만'으로 돌아섰다. "앞으로도 M&A를 지속하겠다"(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조선(대우조선해양 인수) 분야에 새로 뛰어들기 보다는 당분간 기존 사업 부분에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건설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분양 아파트 증가와 조달금리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업부지 매각 등으로 차입금 상환과 유동성 확보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우림건설은 한강신도시 양천지구 및 경기 평택시 용이동 부지를 팔아 자산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고 있다. 주택전문 업체인 월드건설, 현진, 대주건설 등도 국내ㆍ외 부동산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숨고르기' 작업에 돌입했다.
지난해 조선 분야를 성장동력으로 택한 C&그룹도 거제도에 건설 중인 제2조선소(신우조선해양)를 시장에 내놓기로 했다. 중소형 조선사임에도 무려 3조원 어치의 선박 물량을 수주할 정도로 역량을 키웠지만, 자금줄을 쥐고 있는 국내 금융권이 불투명한 경기전망을 이유로 시설자금 대출과 지급보증(RGㆍ선수금 환급보증서)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 여건이 악화하자 자체 구조조정에 매달리는 기업도 늘고 있다. 하이닉스는 이달 말부터 경기 이천공장의 일부 반도체 생산라인을 폐쇄키로 했고, 청주공장도 사업성이 떨어지는 일부 라인을 가동하지 않을 방침이다. 디젤 차량을 주로 생산하는 쌍용자동차도 판매 부진을 이유로 생산인력 재배치와 함께 인력 구조조정에 돌입할 방침이다. 동부하이텍은 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100% 자회사인 동부메탈 지분 일부(40%)를 시장에 내놓았다.
한국경제연구원 김종석 원장은 "미국발 금융쇼크로 실물경제가 더 침체될 게 분명하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이 몸집 줄이기에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면서 "문제는 내실 경영을 통해서도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진단했다.
박기수 기자 bless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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