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소외된 삶을 천착해온 작가 윤석남(69)이 버려진 개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2003년, 한 신문에서 유기견 1,025마리를 키우고 있는 한 할머니의 사연을 접한 작가는 그 길로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할머니의 집을 찾았다.
150여 마리의 개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너무나 건강하고 예쁜 개들이었다. 이런 개들도 버림을 받는구나. 할머니가 사는 5평 남짓한 컨테이너에는 병든 개들이 가득했다. 낯선 사람이 왔는데 꼼짝도 못했다.
윤석남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핍박 속에서도 개들을 보호하는 할머니의 삶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는데 점점 버려진 개들 하나하나의 감정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산 마티카 나무를 자르고 개 모양으로 드로잉을 하고 표면을 갈고 밑칠을 하고 다시 그림을 그려 넣었다. 1,025마리를 완성하는 데 꼬박 5년이 걸렸다. 30㎝에서 1m가 넘는 것까지, 동물 도감과 상상을 동원해 한 마리 한 마리를 만들어나갔다.
이 작업을 하면서 작가는 자연스럽게 고기를 먹지 않게 됐다. "원래 고기를 워낙 좋아해서 외할머니가 '넌 왜 그렇게 남의 살을 좋아하냐'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개들을 그리다 보니 갑자기 그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상처로 돌아오더군요."
5년간 매달려 온 작업의 결과가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1,025 : 사람과 사람 없이'다. 한때는 사람과 살았던, 그리고 지금은 사람에게 버림받아 사람 없이 살게 된 개들에 대한 이야기다. 지하에 있는 제1전시실. 바닥에 깔린 모래밭에 발을 딛는 순간, 섬뜩하다.
서늘한 조명 속 무채색 개들의 희미한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 하다. 수백 마리 개들은 정면으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30㎝쯤 되는 작은 개들의 가슴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개들도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개들이다.
2층의 제2전시실로 들어서자 환한 조명 아래 개들의 색깔과 모양도 또렷하게 빛을 찾았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개들이다. 한결 마음이 밝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개들의 눈을 보는 순간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치 뭔가를 이야기하는 듯 슬프고 어두운 표정이다. 전시장 가운데 모여 있는 개들을 보기 위해 주위를 빙 돌면 어쩔 수 없이 개들과 일일이 시선을 맞추게 된다. 마치 개들이 관객을 바라보며 따라오는 것 같다. 한쪽 벽면의 큰 거울에는 그 개들과 관객의 모습이 함께 비친다.
대학에서 영문과를 중퇴한 윤석남은 아내로 며느리로 어머니로 살다 나이 마흔에 화가가 됐다. 모성의 강인함을 999개의 조각으로 드러낸 '999', 중산층 여성들의 불안한 내면 세계를 보여주는 '핑크룸' 등을 통해 줄곧 억압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며 대표적인 여성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윤석남은 "버려진 개 하나하나가 소수자, 소외된 이들의 느낌을 갖고 있었다. 여성에서 동물로 관심의 대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확대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9일까지. 입장료는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02) 760-4724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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