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움산(해발 683m)이라.
아마도 우리나라 산 이름 중 가장 발음하기 힘든 산일 것이다. 한 자씩 또박또박 끊어 읽어야 제 발음이 나오지 잘못 읽으면 ‘신음산’이 되고 만다. 꼭대기에 쉰 개의 우물이 뚫려 있다는 기괴한 산봉우리다.
강원 삼척과 동해의 경계 부근, 두타산(1,353m)의 산허리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그리 대단치 않지만 깎아지른 천길 벼랑과 울창한 솔숲, 기묘한 바위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산의 들머리는 삼척시 미로면의 천은사다. 고려 충렬왕 때 문인이었던 이승휴가 삼척의 외가로 낙향해 용안당이란 건물을 짓고 <제왕운기> 를 저술했던 곳이 지금의 천은사다. 제왕운기>
삼척의 미로땅을 찾아가는 길은 그 이름처럼 구불구불하다. 오지로 떠나는 은둔을 위한 여행에 딱 맞는 코스다. 천은사 일주문 앞에 차를 대고 숲이 우거진 초록의 터널로 걸어 오른다. 이 깊은 산 속에 숨은 천은사는 은혜 은(恩)자를 쓴다지만 은둔의 은(隱)자가 더 어울릴 듯하다.
사찰 옆으로 난 계곡을 따라 산길이 놓여 있다. 올해 가뭄이 깊었어도 물소리는 우렁차다. 몇 개의 아치 다리를 넘고 되넘으며 계곡과 길은 계속 서로를 희롱한다. 비탈진 물길이라 물은 고요히 흐르질 못한다. 벌써 바다의 냄새를 맡은 걸까. 마음이 급한 물은 끊임없이 떨어지며 속도를 더한다. 물길을 닮은 산길도 계속 오르막이다.
어느덧 머리 위 하늘이 열리고 계곡 건너편 산자락이 눈 앞에 펼쳐진다. 기암과 노송이 빚어내는 하모니에 탄성이 터진다. 이마의 땀방울이 그 상쾌함에 휘발해 버린다. 오르면 오를수록 풍경은 더 많이 열리고 오르막의 수고로움을 잊게 한다. 뒤돌아 본 산자락 너머로 푸른 장막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고래가 꿈틀대는 동해 푸른 바다다.
100년은 족히 넘었을 커다란 금강송을 돌아 오르면 왼쪽으로 좁은 샛길이 나 있다. 앞선 등산객을 따라 접어드니 거대한 바위집이 나타난다. 은사암이다. 석벽과 반석, 굽은 노송이 어우러져 있다. 거대한 돌집엔 돌기둥 하나가 모로 서 있다. 마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돌집 안은 수도하기 딱 좋아 보이는 공간.
그래서일까. 수많은 이들이 이곳을 기도처로 삼는다. 곳곳에 촛농 눌러 붙은 자국이 가득하다. 돌기둥에 누군가 그려 놓은 빨간 십자가가 흉물스럽다.
본래의 산길로 돌아나와 허벅지를 두들기며 조금 더 오르니 길 옆으로 돌탑이 여럿이다. 무슨 기원들이 그리 많았을까.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라 걸음 걸음마다 시야가 달라진다. 보이는 풍경이 팔색조처럼 변화무쌍하다.
정상 100m 전이란 팻말 인근에 샘이 있다. 백두대간을 타는 산꾼들이 내려와 식수를 길어 가는 귀한 샘이다.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는 얼마 남지 않은 정상으로 걸음을 옮긴다.
바위를 타고 넘어 올라간 꼭대기. 갑자기 펼쳐진 기묘한 풍경에 몸이 겅중겅중 뛴다. 정상은 너른 바위 마당이다. 누가 구멍을 뚫어 놓았는지 돌확이 여기저기 천지다. 분화구로 가득한 달 표면에 착륙한 기분이다.
돌구멍마다 물이 차 있고, 더러 올챙이 개구리도 눈에 띈다. 암반에 뿌리내린 노송 10여 그루가 크게 자라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쉰움산, 오십정산(五十井山)의 표지석 바로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 밑을 쳐다보기가 아찔하다. 벼랑 건너편으론 겸재 정선의 ‘금강산전도’를 그려 놓은 듯한 거대한 암벽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푸른 동해가 기암의 산자락과 합주를 벌이고 있다. 반대쪽 구름옷을 뒤집어 쓴 두타산의 위용도 우람하다.
산행을 마치고 천은사에서 땀을 식힌다. 아담한 절은 그 역사에 비해 그리 고풍스럽지는 않다. 사찰 아래로 난 산책길을 걷는데 길게 이어진 초록의 수로가 눈에 띈다.
짙은 이끼 가득한 수로를 따라가 보니 굴피를 올린 원뿔형의 집이 여러 채 나타난다. 물레방아다. 지금은 물길에서 떼어 놓아 방아를 찧고 있지는 않다. 돌지 않는 방아엔 먼지만 수북하다.
■ 여행수첩/ 삼척 쉰움산
●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를 이용해 삼척까지 간다. 삼척 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태백으로 오르는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 미로역 인근에서 우회전해 천은사까지 외길을 따라가면 된다.
● 정상에 올랐다가 산행이 부족하다 싶으면 두타산까지 1시간 50여분을 더 오를 수도 있고, 두타산으로 오르다 두타산성과 대궐터를 거쳐 동해시 무릉계곡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미로면에는 동굴의 백미인 환선굴과 대금굴이 있다. 금강송 숲이 아름다운 준경묘와 영경묘도 쉰움산과 멀지 않다.
● 천은사 입구에는 손두부와 토종닭을 파는 음식점이 두 곳 있다. 시골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집들이다.
삼척=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