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26일로 출범 60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회갑(回甲)을 맞는 법원 분위기가 마냥 즐겁지는 않다. 4차례의 사법파동을 거치며 사법부의 체질을 강화한 영광의 순간도 있었지만 독재정권 아래서 인권에 반하는 판결로 오점을 남긴 세월이 더 길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26일 열리는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과거사에 대한 사죄 발언을 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사법 60년은 그야말로 오욕과 영광의 교차로 요약된다.
◆ 사법부의 출범(1948년)
8월5일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임명됐고, 11월1일 대법관 5명이 선출됐다. 법원조직법이 공포된 49년 9월26일은 사법부 출범 기념일이 됐다. 분단상황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혼돈은 시작부터 사법부의 눈을 가렸다. 58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세력으로 성장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 선생에게 재판부는 국가변란 등의 혐의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이듬해 집행)했다.
◆ 1차 사법파동(1971년)
61년 5ㆍ16 쿠데타로 파괴된 사법체계가 63년 개정헌법 시행과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대법원장 외 12인의 대법원 판사를 두는 등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권의 개입은 노골화됐다.
서울지검 공안부가 서울형사지법 이범열 부장판사,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 등 3명에 대해 "반공법 위반 피고인의 변호사에게서 술값 등 뇌물을 받았다"며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탄압사건도 그런 분위기에서 불거졌다.
전국의 판사 150여명이 '잇단 시국사건 무죄 판결에 대한 보복'이라며 사표를 내는 1차 사법파동으로 이어졌고 박정희 대통령이 수사중지를 지시하며 일단락됐다.
◆ 사법살인(1975년)
정부가 학생운동세력인 민청학련을 제거하기 위해 인민혁명당을 그 배후로 조작ㆍ발표하고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연루자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항변과 고문 주장을 묵살했고, 20시간 만에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형이 집행됐다. 국제법학자협회는 형이 집행된 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 회한의 퇴임(1981년)
'서울의 봄'이 짧았듯이 '사법부의 봄'도 짧았다. 79년 7대 대법원장에 취임한 이영섭 대법원장은 짧은 민주화 뒤 신군부가 들어서자 압력을 견디다 못해 81년 2년 만에 옷을 벗었다. 그는 퇴임사에서 "오욕과 회한의 역사"라는 말을 남겼다.
61년 대법원 판사에 기용된 뒤 73년 헌법위원, 78년 대법원장 권한대행을 지낸 이 대법원장은 독재정권 하에서 판사들이 느낀 압박과 굴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2차 사법파동(1988년)
노태우 정부가 5공에서 활동했던 사법부 수뇌부를 재임명하자 소장판사 335명이 김용철 대법원장의 사퇴, 정보부 기관원의 법원상주 폐지, 법관의 청와대 파견중지 등을 요구하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판사들의 기대감과 쇄신의지가 하늘을 찌른 결과였으며 김용철 대법원장의 퇴진으로 일단락됐다. 93년 6월 발생한 3차 사법파동에서는 독립성 확보를 위한 법관의 신분 보장과 법관회의를 요구했다.
◆ 대법관 제청파문(2003년)
서울지법 북부지원 이용구 판사가 법원 내부게시판에 '대법관 제청에 관한 소장 법관들의 의견'이라는 글을 올리고 판사 144명이 연서명하면서 '4차 사법파동'으로 불리는'대법관 제청파문'이 발생했다.
보수적인 남성 법원장만 대법관에 임명돼 온 데 대한 개혁세력의 항거였다. 전국법관회의가 소집됐고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존중한다는 선에서 일단락 됐다. 최종영 대법원장은 개혁요구를 받아들여 전효숙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여성 최초 헌법재판관에 지명했다.
◆ 최초의 여성대법관(2004년)
8월 25일 김영란 당시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첫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전효숙 재판관에 이어 '대법관 제청파문'이 선물한 개혁의 결과였다. 2006년 7월에는 전수안 당시 광주지법원장이 두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여성으로서 약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인식의 지평이 대법원 판결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 진보의 대법원 입성(2005년)
11월21일 노동법 권위자인 김지형 판사와 '대법관 제청파문'때 법원개혁을 요구하다 사표를 냈던 박시환 변호사가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여전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연공서열을 깬 진보성향 대법관의 임명은 사법부 역사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2008년 9월에는 학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양창수 서울대 법대 교수가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 신뢰 받는 법원 위해 " … 바란다"
사법부의 가장 큰 버팀목은 판결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 과연 우리 법원과 판결에 대한 국민의 신뢰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전문가들은 국민의 충분한 신뢰를 받기에는 법원의 시스템이 여전히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사법부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전문가들은 ▦판사인사 시스템 개선 ▦전관예우 관행 폐지 ▦대법관 인선 다양성 확대 등을 꼽았다. 인권보호와 피해구제의 최후 보루로서 사법부가 제 기능을 하는데 핵심 사항이라는 지적이다.
김갑배 전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이사는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하지 못하면 바로 법복을 벗어야 하는데, 이로 인해 능력 있는 법관들이 법원을 떠나면서 법관 연령이 낮아져 판결에 대한 신뢰까지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법 부장판사 승진ㆍ발탁 제도가 없어져야 법관 개개인의 소신 판결이 늘어나고 연륜을 갖춘 판사들이 법원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홍복기 연세대 법대 학장은 "판사 임용도 보다 넓게 개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전관예우에 대한 쓴소리도 나왔다. 임지봉 서강대 법대 교수는 "대부분의 대법관이 퇴임 후 대법원 사건을 수임하는 관행이 여전하고 전임 대법관 이름이 대리인 명단에 올라 있는 경우 적어도 심리불속행(원심 판결이 헌법 또는 법률 등을 위반하지 않았다면 심리를 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을 당하지는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대법관은 최고 영예의 자리인 만큼 퇴임하고 나서 소송 대리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신속한 재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의 주문도 나왔다. 송호창 변호사는 "문제가 있는 과거를 인정하면서 사죄하고, 그에 대한 재발방지 조치를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청구가 들어간 재심 재판들도 진행이 너무 늦다"고 말했다.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팀장은 "사법부의 존재 의미는 기본권 보장과 더불어 사회적 약자 보호에 있다"며 "업무방해죄를 지나치게 넓게 적용하는 등 노동사건이나 형사사건에서 잘못된 것이 많은데 약자 보호에 좀 더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대법원 인적 구성의 다양성이 더 확보돼야 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참여연대 박 팀장은 "대법관 구성은 지난 몇 년 사이에 점진적인 변화가 있지만 앞으로도 그런 방향은 유지돼야 한다"며 "사회적 가치관의 다양성이 존중될 수 있도록 인적 구성 역시 변화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 26일 60주년 기념행사/ 법원전시관, 대법원 청사에 문열어
대법원은 25일 서울 서초동 청사에 사법부 60년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법원전시관을 열었다.
경국대전 영인본, 최초의 한글 전용 판결문, 판사 임명장 등 사법부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사료를 전시했다. 재판 절차나 제도, 법정 모습을 동영상과 모형으로 설명하고, 법복(法服)을 비치해 누구나 입어볼 수 있는 체험장도 마련했다.
또 심청전, 혹부리 영감, 춘향전 등 고전동화 속에 드러난 법률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소개하고, 직접 동영상을 찍고 글을 작성해서 판사에게 메일로 전송할 수 있는 전자방명록도 설치했다.
당초 어린이들에게 판결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시대의 명판결(가칭)' 전시를 계획했지만, 각 시대를 대표하는 판결로 확대해석 되자 헌법 전문을 전시하는 것으로 대체해 아쉬움을 샀다. 전시관은 평일(월~금)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무료로 개방한다.
한편 26일 열리는 '사법 6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가정법원을 설치하고 판결서 한글전용화를 실현한 고(故) 조진만 전 대법원장과 한국적 역사주의 법학을 주창한 박병호 전 서울대 법대 교수, 권오곤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사법부 전산화의 기초를 닦은 노영보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전산등기부 시스템을 도입한 황찬현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5명에게 훈장이 수여된다.
이진희 기자 권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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