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모로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8월의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나침반, 화약, 종이 등 이른바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 3대 발명품 역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 바 있다. 근대 과학혁명기 이후 서양 과학에 뒤처져 서구 열강 세력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기도 하였으나, 고대로부터 15세기 경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앞선 과학기술 문명을 지녀왔다는 사실을 중국인들은 세계 만방에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과학기술이 세계적 수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던 시기가 있었으니, 바로 조선 초기 세종 시기이다. 측우기, 자동 물시계 자격루, 혼천의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 시기의 과학문화재들뿐만 아니라, 칠정산(七政算)이라는 달력 또한 자체의 역법에 바탕한 대단히 우수한 달력으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인기리에 상영 중인 영화 중에 세종 시기에 만들어진 로켓 무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 대국의 횡포에 신음하며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던 세종이, 명나라의 '무기사찰'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가공할 위력을 지닌 신형 로켓추진 무기를 개발한다는 내용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며칠 전 나름 재미있게 감상하면서도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경계, 민족주의적 감수성 등에 대해 논란이 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구체적인 영화 평론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세계적인 물리학자 고 이휘소(李輝昭) 박사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관여했던 것처럼 설정하여 논란이 되었던, 약 10여년 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영화로도 선보인 어느 소설을 떠올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과학문화가 척박하기 그지없는 우리 현실에서, 전통 과학기술이나 우리나라 과학자가 영화와 소설의 주된 소재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은 아무튼 과학기술인의 입장에서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일 것이다. 숱한 텔레비전 드라마들 중에서도 다른 전문직종의 직업군과는 달리 과학자나 연구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할 정도도 안 될 터이니 말이다. 또한 이들 영화나 소설이 아니었더라면 조선 초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다연장 로켓화기를 개발했다는 사실도, 이휘소라는 걸출한 물리학자의 이름도 아마 대중이 접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꼭 우리의 과학기술이나 과학기술인은 그 힘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통쾌하게 굴복시키는 등의 영웅적 활약으로 짜릿한 민족적 카타르시스(katharsis)를 제공해야만 환영과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시달림을 받아 왔기에, 아니면 우리의 과학기술이 그 동안 세계적으로 주변의 위치에 머물러 왔기에 그러한 극적인 역전을 꿈꾸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이해해야 할까?
다 좋으나, 과유불급(過猶不及), 무엇이건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법이다. 다시 거론하기조차 싫지만 몇 년 전 논문조작 등의 중대한 물의를 일으킨 어느 생명과학자에 대해, 일반 대중 뿐 아니라 일부 사회지도층 인사들조차 맹목적인 추종과 온갖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인 이유도, 그가 우리 민족을 단숨에 구원으로 이끌 것이라는 헛된 망상과 기대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때문이 아니겠는가?
최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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