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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내가 쪼개는 이 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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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내가 쪼개는 이 빵은

입력
2008.09.24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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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 토마스

내가 쪼개는 이 빵은 일찍이는 연맥(燕麥)이었다.

이국의 나무에서 핀 이 포도주는

그 열매 속에 파고들었다.

낮에는 사람이 밤이면 바람이

곡식을 휘어 넘기고, 포도의 기쁨을 깨뜨렸다.

일찍이 이 포도주 속에서 여름의 피는

포도덩굴을 장식한 살 속으로 흘러들었다.

일찍이 이 빵 속에서

연맥은 즐거이 바람에 흔들렸다.

사랑은 태양을 부수고, 바람은 끌어내렸다.

당신이 뜯는 이 살, 당신의 혈관 속에서

황량하게 하는 이 피,

그것은 관능의 뿌리와 수액에서 태어난

연맥과 포도였다.

당신이 마시는 내 포도주, 당신이 씹는 내 빵은.

포도알과 귀리는 태양과 바람의 자손들이다. 대지는 태양과 바람의 애무를 한껏 즐긴 뒤에 지상의 식탁에 포도주와 빵을 올려놓는다. 이런 건강한 관능이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있게 하는 것이다.

대지와 하늘의 혈족들을 위해 포도와 귀리는 기꺼이 자신들의 피와 살을 내놓는다. 자신들을 있게 한 사랑이 깨어진대도 좋다. 지상의 주린 몸속으로 흘러들어 또 하나의 더운 피가 되고 바람이 되어 불어가는 것이 더 큰 사랑의 형식이어서다.

포도와 귀리 속에 든 게 태양과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 속에는 구름과 빗방울, 무료할 때마다 들려오던 새소리와 빗소리가 들었고, 들판을 건너오는 천둥소리에 근심하던 농부의 발자국 소리가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발효된 게 포도주와 빵이다. 이들을 낭비한다는 것은 곧 내 살점과 피를 황량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손택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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