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근ㆍ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이 이념대립으로 변질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교과서 개정 공세는 정권 교체에 성공한 여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 진영이 시작했다. 이들은 각종 토론회 등을 통해 "지난 10년간 제기됐던 교과서의 이념 편향 시비를 이번에 반드시 가려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 이른바 '좌편향된' 역사교과서를 대폭 수정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최근 국방부 통일부 등 정부 일부 부처와 대한상공회의소 등이 교과서 수정 요구에 가세하면서 논란이 가열되는 양상이다.
민주당 등 진보 진영은 "좌시하지 않겠다"며 강경한 태세다. 보수 진영이 교과서 수정이나 개정을 통해 정권적 시각을 담으려는 의도가 짙다는 게 진보 진영측의 판단이다.
교육계에서는 역사교과서 논란이 이념 논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교육이 이념 논리에 휩싸일 경우 학교 현장에서는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교과서가 수정 또는 개정이 필요하다면 이념이 아닌 내용의 분석이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다.
파상적인 수정 공세
22일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9월 현재까지 교과서 내용 수정을 요구한 정부 부처나 기관은 총 19곳으로 집계됐다. 건수로는 3,723건이다. 이 중 도마에 오른 역사교과서를 고쳐달라고 공문을 교과부에 낸 기관은 국방부 통일부 대한상공회의소 등 3곳이다.
국방부는 모두 25건의 보완 및 개선 요구 의견을 냈다. 특이한 점은 3건을 제외하곤 모두 특정 출판사(금성출판사) 교과서에 국한됐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와 관련한 내용이 특히 눈길을 끈다. 중앙교육진흥연구소 발간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291쪽 '이승만 정부는 독재정권을 유지했다'는 내용을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수정할 것을 요청했다. '전두환 정부는… 권력을 동원한 강압정치를 했다'는 '전두환 정부는…친북적 좌파의 활동을 차단하는 여러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쳐 달라고 요구했다. 전두환 정권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교과서를 수정해달라는 것이다.
통일부는 김대중 정부 시절의 '햇볕정책'을 '화해 협력 정책'으로 대체해줄 것을 요구했다. 햇볕정책은 김대중 정부 당시의 대북정책인 화해 협력 정책의 별칭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대한상의측의 수정 요구도 여러 건 됐다. '목포의 눈물에는 우리 민중들의 설움과 저항 의식이 깃들어 있다'는 부분은 삭제를 요구했다. '1960년대 이후 정부가 추진한 경제 개발 계획은 대부분 외국에서 빌려온 자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구절은 '이는 당시 국내 자본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내용을 뒤에 첨부해줄 것을 요청했다.
보수와 진보의 '교과서' 이념충돌
정부와 여당 등 보수 진영의 대대적인 역사교과서 수정 공세는 특정 이념에 편향된 반향으로 교과서를 개편하려는 의도가 짙다는 게 진보 진영의 시각이다. 교과서 개편의 키를 쥐고 있는 교과부도 이를 인정하는 눈치다. 실제 뉴라이트 단체인 '교과서 포럼'은 최근 한나라당 관계자들과 만나 교과서 개편 관련 간담회를 했는데, 이 자리에서 교과서포럼 관계자들이 일부 교과서의 이념 편향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면서 개편 필요성을 강력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과부 관계자는 "이번 주에 열릴 당정회의때 교과서 개편 논의가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이를 두고 "정부와 여당이 본격적으로 입맛에 맞게 교과서를 확 뜯어고치겠다는 의미"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참여정부 때부터 일부 교과서 내용을 좌편향이라고 공격해 온 보수 진영이 본격적으로 교과서 개편에 뛰어들 것이라는 얘기다.
진보 진영은 특히 교과부를 주목하고 있다. 교과서와 관련해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다른 부처에 먼저 수정 의견 제시를 요청한 적이 없는 교과부가 국방부 등에 수정 의견 제시 공문을 보냈기 때문이다. 진보 성향의 한 학부모단체 관계자는 "교과부가 주도적으로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의견을 취합했다는 뜻으로, 교과서 수정을 전제로 한 행동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진보신당은 이날 논평을 내고 "교육을 정치권 이념 전쟁의 빌미로 삼아서는 안 된다"며 "사실에 기초해 기술해야 할 역사교과서를 정부 취향에 따라 기술하려는 시도는 국민을 훈육하려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교과부의 선택은
교과부는 매우 신중한 입장이다. 큰 그림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정부 부처 등으로부터 취합한 여러 수정 의견들을 국사편찬위원회에 넘겨 검토중인 만큼 결과가 나와봐야 수정 여부를 판단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과부 관계자는 "예년에는 단순 사실관계 수정 요구가 대부분이었는데, 올해에는 이념을 둘러싼 수정 요청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늦어도 11월말까지는 교과서 수정 작업에 대한 결론을 내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교과부 주변에서는 역사교과서 수정의 '수준'을 주시하고 있다. 수정의 폭이나 내용이 예년처럼 일반적인 정정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 있지만, 한나라당내 '교과위원회' 구성 등 교과서 수정을 기정 사실화 한 정부와 여당의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미뤄볼 때 예년 수준을 넘어서는 개편이 뒤따를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전면 개편은 아니더라도, 보수 진영의 요구를 반영한 상당 폭의 수정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진각 기자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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